보스포러스에 정박한 정화(鄭和)함대
2015 ABU 총회 참관기 2
‘정화(鄭和)’는 본디 무슬림이다. 명나라를 제국의 반석에 올려 놓은 영락제(1360~1424)의 지시로 1405년부터 1433년에 이르기까지 일곱 번의 세계 원정 항해를 이루어낸 정화함대의 선장이자 지휘관이었다. 본래는 ‘마(馬)’씨로 당시 ‘마흐무드’나 ‘모하메드’로 불렸을 것이다. 그의 선조들은 이미 원나라 시기부터 중국대륙에 정착했는데, 칭기즈칸이 친정으로 복속 시켰던 당시 서아시아 최강국 호라즘(이란 일대의 셀주크투르크 왕조)에서 원나라의 국제도시 카라코룸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된다. 명나라의 위세에 걸맞은 세계 교역항로의 개척을 위해 그는 총3,500척의 함선과 연인원 3만 명의 선원을꾸려 28년 간 말라카, 인도, 스리랑카, 호르무즈, 아프리카의모가디슈와 몸바사까지 대양을 누볐다. 서양역사가 누누이 자랑해왔던 유럽의 대항해시대 보다 무려 1세기를 앞서는 실로위대한 항해였다.
해양의 패스파인더 ‘정화’의 향취 아른거리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제52차 ABU 총회가 10월 24일부터 8일간 개최됐다. 아시아 태평양 일원 및 유럽의 60개국 603명의 방송인들이 모여“시청자 공헌을 통한 아시아 태평양의 도약”을 주제로 테마별 컨퍼런스와 포럼, 슈퍼패널 토론회 등을 진행하며 다각적인 미디어 영향력의 확장을 고민했다.
수많은 포럼 중 가장 잔상에 남는 것은 ‘Women With the Wave’시리즈로 각 나라 방송의 여성 어젠다와 관련한 심층세션이었다. 정부 여성정책의 감시, 어젠다 세팅에 대한 역할,여성 방송인의 영향력 확대 등에 대한 발제와 토론이 이어졌다. 국가별로 여성의 사회참여 척도와 파급력 등이 다르므로 일정한 평균영역을 논하기 어렵겠지만 ABU에 속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의 이른바 제3세계 여성 언론인들은 호쾌한 포럼의 주제와 동떨어진 고충과 딜레마를 토해냈다. 그들은 아직도 여성의 언론과 방송 진출에 부정적인 사회의식과 분투하며 마이크와 카메라를 부여잡고 있지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취재 거부, 폭언, 멸시와 직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언론인의 업무보다 출산, 육아, 복지에서 불이익과 차별을 견디는 일에 먼저 익숙해질 것을 강요받고 있다. 이미 오래전 이러한 험로를 개척하고 주파한 ABU 회원사들의 경험과 도움을 통한 준거형성이 절실해 보였다. 특히 독일 ZDF 등이 소개한 여성인력에 대한 복지를 차용하고 목표로 설정했으면 한다. 유럽 여성 방송인들의 발제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던 그들의 시선을 모두가 안타깝게 마주했다.
“정화함대는 콜럼버스보다 70년 앞서 아메리카를 발견했고, 마젤란 함대보다 백년 가까이 빠르게 세계일주를 완성했다.” 영국의 해양 역사학자 개빈 멘지스의 주장을 당초 서양역사 학계는 하나의 역사소설로 분류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발견된 15세기 중국 항해도와 아메리카 인디오에서 추출된 중국인 DNA, 마젤란 함대의 기록 등을 토대로 멘지스가 증명한 결과 이제는 소설에서 불편한 진실로 바뀌어가고있다. 인류역사를 재편했다는 유럽의 대항해는 이미 그보다 한 세기 앞선 정화함대의 항해를 덧칠하듯 뒤따른 것에 불과했다.
후발 서양함대가 침탈과 도륙을 통해 신대륙을 정벌한 것에 반해, 정화함대는 뱃머리가 닿는 곳마다 동맹을 맺고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며 평화적으로 문화를 전파했다. 심지어 내분을 겪고 있던 두 원주민 집단을 중재해 평화의 공덕비가 세워졌고 조공과 교역물량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렇듯 다른 문화를 존중하되 궁극적으로 동질감을 추구하는 ‘구동존이(求同存異)’의 화친정책으로 그들의 문화 교역을 크게 넓혀 나갔다.
정화의 교류정신은 이번 ABU 총회의 ‘슈퍼패널’ 토론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ABU 회원사의 CEO 등이 직접 참여해 ‘시청자 공헌 확장’을 주제로 자신들의 방송정책과 추진사례를 소개하는 형식이다. 인도를 대표해 참여한 AIR(All India Radio)의 CEO Jawhar Sircar는 현재 인도 방송의 주관심사는 공정한 선거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높이고 여성의 사회참여를 높이는 것이라 밝혔다. 지역 간, 계층 간 이해의 간극을 좁히고 보다 진일보한 사회구조를 만들어가는 것을 시청자 공헌의 지향점으로 삼았다. 이런 목표를 위해 시사를 활성화하고 뉴스에서 선거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기획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1980년대 대한민국에 일었던 ‘공명선거를 통한 사회변화’라는 열망의 바람이 순간 다시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KBS는 1983년 6월 30일부터 138일간 방영했고 올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이산가족 찾기 특별생방송’을한국의 대표적인 시청자공헌 사례로 발표했다. 어떤 성격의방송이었는지, 또 어떤 영향을 가져왔는지 이미 세계 방송계가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단순히 복기하는 수준의 나열보다는 이런 장르의 프로그램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제안을 덧붙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보스니아 등 심각한 내전을 겪은 분쟁국가나, 시리아처럼 가족 간 격리로 생사를 확인하기 어려운 난민발생 지역에서의 방송이 그 예다.
그렇다면 향후 중동버전, 유럽버전의 ‘이산가족 찾기’가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올해 ABU 슈퍼패널에서 많은 관심을 받은 분야는 재난방송 시스템이었다. 일본 NHK의 재난방송 책임자는 그들이 개발한 ‘재난이처럼 ABU 총회의 가장 큰 미덕이자 가치는 “교류를 통한 전진”일 듯 싶다. 토론의 장에서 각 방송사들은 우월감 없이 자신의 현상과 마인드를 여는 동시에 열패감 없이 받아들인다. 이물질이 섞이면 거부반응이 나타날 수 있지만 오히려 조류와 강물이 혼합되어 기수역<汽水域>으로 흘러들 듯 자연스럽게 화학결합을 만들어갔다. 먼저 떠난 함선이 개척한 항로와 항해 경험을 나누어 가진다. 이는 상호발전에 충실한 ‘Interactive Meeting’의 전형이다.
방송전파산업을 큰 바다라고 보면 우리와 같은 지상파방송은 정화함대의 역할을 해왔다. 매개가 없던 대륙 곳곳을 항로로 연결해 문화를 알리고 교감하도록 했다. 새로움의 통로가 되어왔고 서로 다른 문화의 교류작용을 활발히, 평화롭게 지휘했다. 하지만 대양에는 다른 함대들이 출현하고 있다. 정화함대가 지나온 항로를 뒤쫓아 콜럼버스와 마젤란의 함선들이 빠르고 거칠게 따라 붙는다. 그들의 돛에는 ‘통신재벌’, ‘인터넷 스트리밍’, ‘MPP’의 깃발이 나부낀다. 돈과 망을 앞세워 항로 규정을 어기고 항구의 질서를 무시하면서 항해하고 있다. 그들은 신대륙에서 더 많은 금과 보석을 탐한다. 이미 대양은 혼돈의 바다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파는 정화함대가 그랬듯 견성판과나침반으로 항로 좌표를 정하고 ‘믿음의 공헌’과 ‘사랑받는 콘텐츠’가 정박할 수 있는 약속의 땅을 찾아 물살을 갈라야 한다. 바다를 안온히 넘겨줄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흥망에 따라 15세기의 정화함대는 망각의 항로에서 사라져 갔지만, 지상파의 함선들은 견실한 문화의 전령으로 항해를 지속해 나갈 것이다. 이제 보스포러스 해협에 ABU의 이름으로 잠시 정박하고 뜻을 나눈 지상파 함선들이 돛을 세워 대양으로 흘러 들어간다. 또 다시 새로운 바다로 향한다. 그것이 바로 21세기 정화함대의 본령(本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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