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청춘
며칠 전 다큐멘터리 시사회를 하다가 70년대 라면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간식인 라면은 최근에는 수십 가지 종류로 그 영역을 확장했지만 70년대만 하더라도 두어 개 종류만 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이야 라면은 가장 값싸게 끼니를 때우는 음식으로 ‘전락’했지만 초창기의 라면은 고급 음식이었습니다. 간식으로 라면 한 번 먹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딱히 간식거리도 많지 않던 시절에 오남매를 위한 라면을 끓이는 것은 어머니에겐 큰일이었습니다. 거리 곳곳에는 쌀집이 있어서 쌀 한두 되를 사는 심부름을 하던 여자 아이들이 있었고, 연탄불을 꺼트린 집에서는 ‘번개탄’이란 것을 사서 연탄불을 붙이던 장면도 흔히 볼 수 있던 때였습니다.
라면의 맛을 내는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스프’와 쫄깃쫄깃한 면발입니다. 칼국수와 수제비도 맛이 있지만 라면 스프의 감칠맛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조미료를 많이 넣은 탓이라고 해도 특유의 스프 맛에는 중독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에야 수십 가지 다른 종류의 라면을 언제든 먹을 수 있는 형편이 되었지만 그 어떤 라면도 그 시절 먹던 라면 맛을 따라가지 못하는 듯싶습니다. 그때는 어머니가 쫄깃쫄깃한 라면을 만들지 않고 불어터진 면발을 만들던 것이 영 불만이었는데, 이제는 그 사정을 아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때로는 라면에 왜 국수를 섞어서 끓여주셨는지 알게 되었을 때, 저는 어머니의 그 나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스프’가 영어의 ‘수프(soup)’에서 온 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을 때는 신기하기도 했었지요.
중학교 때는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주말에 공립도서관을 찾았는데, 도서관 맞은편에 ‘수양분식’이라는 분식점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냉면 그릇으로 주로 쓰이는 스테인리스 넓은 그릇에 꼬들꼬들한 면발의 라면을 내다 주면 젓가락을 입에 갖다 대기도 전에 군침부터 돌았습니다. 몇 년 전에 ‘수양분식’이 남아있나 해서 일부러 그 동네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대로 남아있다면 40년 전의 그 맛을 보기 위해 라면 한 그릇을 주문했겠지요. 그런데, ‘수양분식’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맞은편의 공립도서관도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고 그 자리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동네 자체가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냥 낯선 도시에 서있는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라면이 맛있었던 것은
청춘과 젊음, 순수함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은 라면 먹는 일도 흔치 않습니다. 가끔씩 휴게소에서 먹는 라면의 맛은 40년 전의 그 맛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끓여주던 퉁퉁 불어터진 그 라면이 훨씬 맛이 있었습니다. ‘수양분식’의 ‘꼬들라면’도 아닙니다. 과거의 모든 일에 장밋빛을 더해서 그런 것일까요? 어쩌면 라면이 맛있었던 것은 청춘과 젊음, 순수함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라면 전문점이 생기고, 떡라면, 만두라면, 해장라면, 콩나물라면, 짬뽕라면, 불라면 등 온갖 미사여구를 붙인 라면을 최고의 셰프가 요리한다 해도 40년 전 그 라면보다는 맛이 없습니다. 그때 우리 모두는 청춘이었고 우리 삶은 찬란했습니다.
4년 전 미국에서 당시 사상 최고의 복권 당첨금(5억 9,000만 달러, 6,600억 원)을 받은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그는 84세의 할머니였습니다. “내 배는 60년 늦게 들어왔습니다. 나를 60년 더 젊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이 돈 모두를 주고 바꾸겠어요.(My ship came in 60 years too late. I would trade all this money for anything that can make me 60 years younger.)” 미국인들은 행운이 찾아온다는 것을 배가 들어오는 것에 비유를 한다고 하네요. 84세의 나이에 6,600억 원의 돈, 그 돈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래서 청춘은 아름답다는 말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입어도 아름답고 무엇을 먹어도 맛있고, 미래는 장밋빛이기만 한 그런 시절 말입니다. 지금 시대의 청춘은 ‘3포’, ‘5포’, ‘N포’라는 말로 좌절한다고 합니다. 미래는 없고 계획도 없고 그래서 ‘욜로(YOLO) 홀로’ 시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학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말했다가 비판받기도 했는데, 그래도 84세의 그 할머니 말처럼 청춘은 6,600억 원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대전MBC 사장 이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