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 사회
이제는 이미 잘 알려진 한국 대학 총장과 미국 대학 총장 간의 대화가 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내로라하는 명문대를 이끌던 한국의 대학 총장이 자랑스럽게 미국 대학 총장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대학은 올해 대기업에 많은 학생들을 취직시켰습니다. S전자에 000명, L전자에 000명, H사에 000명 등 규모면에서 압도적입니다. 웬만한 대학은 이런 일류 기업에 20~30명을 취직시키기도 힘든 데 말입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최고 취업률을 기록했습니다. 우리 대학은 이 같은 전통을 계승해서 명문대학으로서의 위치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미국 대학 총장이 이렇게 받았다고 하지요. “우리 대학 출신의 A는 지난 해 아프리카 난민 지원에 백억 원을 기부했습니다. 10년 전에 졸업한 B는 기업을 성공시켜 번 돈으로 남미 빈민촌에 학교를 지어주었습니다. 성공한 기업인 C는 학교에 장학금 50억 원을 쾌척했습니다. 올해도 그런 졸업생이 많이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 말을 들은 한국 대학 총장의 얼굴이 벌개졌다고 합니다.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더 좁다고 하는 취업을 많이 시키는 것, 물론 중요합니다. 일단 취업을 해야 나를 위해서든, 가족을 위해서든, 사회를 위해서든 무언가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내가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설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일자리를 갖는 것입니다. 두 총장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것은 사람을 보는 기준이기도 하고 삶을 보는 시각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좋은’ 회사에 많이 취직시킨 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고, 미국의 경우에는 사회를 위한 공헌에 무게를 둔다는 것입니다. 취직을 하는 것은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지는 첫걸음에 불과할 뿐이지 그 자체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취직을 한 결과, 내 생계를 책임지고 조직이나 사회를 위해 공헌을 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가 자랑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명예가 되는 사회에서는
‘껍데기’에 치중하는 전통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취직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도 잘나가는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을 명예스럽게 생각합니다. 역설적으로, 이 말은 ‘껍데기’가 목표이며 알맹이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잘나가는 기업에 취직을 하면 끝이라는 말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들에서는 생계 수단으로 취직하는 것이 무슨 찬사를 받을 일이냐고 생각한다는 거지요. 존경 받는 이들은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했느냐 하는 것이며, 거기에서 인간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본다는 겁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거기에서 나왔겠지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명문대에 다니고, 일류 기업에 취업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우러러볼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겨우 자신을 위한 일을 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그의 ‘스펙’이 한 줄 더 늘어나고 그 자신을 위한 수단이 하나 늘어났을 뿐인데 우리는 그에게 경외심까지 가질 때가 있습니다. 알맹이가 아닌 ‘껍데기’에 감동한다는 얘깁니다.
입시철이 지나면 어김없이 신문에는 어느 고등학교가 S대에 몇 명 입학시켰나를 기준으로 학교 순위를 발표합니다. 유일한 기준은 단 하나의 학교, S대 입학생 규모입니다. 거기서 서열이 정해집니다. 교육 문제가 심각하다고 입을 모으면서도 막상 자녀의 문제가 되면 어느 학교가 명문대에 입학을 많이 시켰는지를 따져 보고 가급적 그 학교에 입학시키기를 원합니다.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목표가 되고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명예가 되는 사회에서는 ‘껍데기’에 치중하는 전통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여인은 딸을 ‘명문대’에 보내려고 자신이 가진 권력을 사용하여 온갖 편법을 동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껍데기’ 추구의 종말은 비참했습니다. “돈이 실력이고 돈이 없는 부모를 원망해야 하는” 이에게 미래가 있겠습니까.
대전MBC 사장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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