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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의창

실적

실적

2년 만에 만난 지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실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2~3분도 되지 않아 ‘실적’이라는 말을 대여섯 번 입에 올렸습니다. 매일 본부에서 ‘실적’을 점검하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마침 그날은 그가 맡고 있는 본부의 실적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스트레스 지수도 따라 올라갔던 모양입니다. 특히 밤 시간에 전화가 울리면 깜짝깜짝 놀란다고 했습니다. 그가 맡은 지역에서 무슨 사고가 터진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순간적 스트레스 지수를 올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휴대폰도 수시로 체크했습니다. 혹여 중요한 연락 사항을 빠트릴까 해서였습니다.


방송에서의 ‘실적’은 시청률입니다. 처음 입사했을 무렵에는 MBC와 다른 방송사 한 군데만 있어서 거의 독과점체제였습니다. 게다가 MBC는 드라마왕국, 예능왕국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보도 부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뉴스 앵커 시스템을 가장 먼저 도입했고, 그래서 앵커들이 연예인만큼 인기를 누리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잘 나갈 때는 뉴스 시청률이 30퍼센트를 훌쩍 넘었습니다. 요즘엔 드라마가 시청률 15퍼센트를 넘기면 ‘대박’이라고 하니 옛날이야기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청률 조사도 더 미분화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프로그램 평균 시청률만 나오던 것이 이제는 ‘순간 시청률’이라고 해서 거의 초 단위로 조사되어 나옵니다. ‘순간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명장면이라는 기사 제목도 종종 등장하곤 합니다. 현장 기자로 일할 때는 분 단위 시청률을 보면서 내가 보도한 기사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할 때는 희열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방송 제작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시청률 표는 ‘성적표’이자 ‘실적’입니다.


한때 두세 개 채널에 불과하던 한국의 방송업계는 이제 전 세계 채널을 수신할 수 있는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백 개가 넘는 채널에 수백 개, 수천 개 프로그램을 일상으로 접하고 있습니다. 국내 채널만 해도 수십 개가 되었지요. 그러니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으려면 그야말로 ‘특단의 무언가’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재미가 있든가 의미가 있든가 해야 한다는 겁니다. 한발 더 나아가 의미만 있어서도 안 된다고 합니다. 의미가 있는 것을 재미있게 풀어내는 것이 실력이라고 하지요.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으려다 보니 자막은 더 커지고 출연자들의 ‘액션’도 더 요란해집니다. 예능 프로그램의 승부는 자막과 씨지(CG, computer graphic)에 달려 있다는 말도 나옵니다. 대체적으로 볼 때 시청률은 정직합니다. 잘 만든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의 선택을 받는다는 겁니다. 나는 잘 만들었는데 시청자들이 알아봐주지 못하는 경우는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좀 벗어났습니다. 초일류 기업으로 꼽히는 그 기업에서, 직장인의 ‘별’이라는 임원 자리에 올라 수백 명의 직원을 지휘하고, 적지 않은 연봉을 받는 지인은 2년 만에 만난 사람을 보자마자 ‘실적’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아침 7시면 사무실로 출근해서 전날의 실적을 챙기고 또 다른 ‘전투’에 나선다는 겁니다. 어느 공기업에서는 임원 되는 것을 피한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임원의 임기는 2년, 그 뒤에는 무조건 퇴사를 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임원이 되지 않기 위해 가급적 인사권자와의 대면 기회를 피하고 해외나 지방 근무를 선호하는 직원도 있다고 했습니다. 요즘 같은 시절에 정년을 채우고 퇴직하는 것이 직장인의 별이라는 임원보다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수명은 연장되고, 그래서 퇴직 후 세월 역시 길어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경찰서장을 지내다 퇴직한 어떤 이는 일찌감치 퇴직 후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제빵사, 요리사, 사회복지사 등 그가 취득한 자격증도 많습니다. 업무 약속은 점심시간에 하고 퇴근 후는 주로 자기 계발에 신경을 쓴 덕분입니다. 그는 지금 보안업체에서 고문을 맡고 있는데, 자신이 평생 일했던 분야와 관련 있는 곳에서 일하게 되니 그 또한 복이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젊음은 영원할 것 같지만 나이 들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삶이 계속될 것 같지만 죽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현재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또 다음 자리를 준비하면 편안한 노후를 맞을 수 있겠지요. ‘실적’에 스트레스 받던 지인을 보며 느낀 생각입니다.


대전MBC 사장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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