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알고 있지
“200회를 맞아 초대석에 앉은 허참과 유지은 아나운서. 1일 MC 이동준의 질문에 환한 웃음과 함께 답하고 있다 이동준이 묻고 허참이 답하다 허참에게 ‘토크&조이’란?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를 건너야 모래밭에서 잠들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포탄이 날아가야 포탄 사용이 영원히 금지될까 친구여, 그 답은 바람 속에 흩날리고 있다네 대답은 바람에 실려 오고 있다네 …"
제가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1994년 여름 바그다드에서였습니다. 밥 딜런의 ‘Blowingin the Wind(바람은 알고 있지)’의 첫 소절들입니다. 노래를 부른 것은 허스키한 음색의 밥 딜런이 아니었습니다. ‘오리지널’이 아니었다는 얘깁니다. 노래를 부른 이는 바그다드에서 알게 된 S였습니다. 그는 당시 바그다드에서 연수를 하고 있던 저를 도와준 친구였는데, 30대 후반이었습니다. 농담도 잘하고 쾌활한 성격의 그는 철권통치를 하던 사담 후세인의 바그다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여차하면 정보부에 끌려갈만한 수위 높은 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공학을 전공하면서 기계공장을 운영했는데, 연수 초기에 물정 모르던 저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습니다.
연수를 하던 무스탄스리야대학교까지 매일 차로 등하교를 시켜주면서 그가 즐겨 부르던 노래가 ‘Blowing in the Wind’였습니다. “이 노래 알고 있나요?”라는 물음에 저는 난생 처음 듣는다고 답을 했고, 그는 어떻게 이 노래를 모르냐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글스의 ‘Hotel California(1976년 발표)’나 폴맥카트니의 ‘Ebony and Ivory(1982년 발표)’를 듣던 세대에게 딜런이 1963년 발표한‘Blowing in the Wind’는 낯설게만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그에게는 추억과 슬픔의 노래였습니다. 이라크는 지난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전쟁을 겪어왔습니다. 1980년부터 88년까지 8년동안 이웃나라 이란과 전쟁을 했고, 이 전쟁이 끝난 지 2년 뒤인 1990년에는 쿠웨이트를 침공했습니다. 그에 대한 응징으로 미국을 필두로 한 다국적군이 1991년 이라크를 침공해 쿠웨이트를 ‘원상회복’시켰습니다. 국제사회는 사담 후세인이 다시는 활개를 치지 못하도록 초강력 경제제재를 가해 이 나라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습니다. 2003년의 이라크전쟁, 그리고 이후 이슬람국가(IS)와의 내전까지, 그야말로 이라크는 한 세대를 납치당했다고 할 정도로 전쟁으로 점철된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S가 ‘Blowing in the Wind’를 부른 것은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해 저항가요, 반전가요를 부르고 있었던 겁니다. 1994년 기준으로 벌써 14년째 전쟁을 벌이고 있던 조국이 안타깝고 강권통치를 휘두르던 지도자를 혐오스러워하던 그였는데, 그 전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석유 매장량 세계 2위를 자랑하던 이라크는 한때 전 세계로 해외 유학생을 보냈습니다. S도 1970년대 말 정부 장학생으로 일본에서 유학을 했고 그는 거기서 ‘Blowingin the Wind’를 배웠습니다. 1970년대 한국의 시위현장에서도 이 노래가 불렸지만 일본에서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는 자유와 젊음, 청춘과 꿈이 있었던 그 시절 그곳으로 달려갔을지 모릅니다. 전쟁 속의 젊은이에게 위안을 주던 노래,‘Blowing in the Wind’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시나 소설 뿐 아니라 대중가요 역시 위대하다는 것을 선언한 ‘대사건’입니다.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의 호도, T.S. 엘리어트의 황무지를 암송하던 소년 소녀들은 평생 동안 아름다움을 마음 한 쪽에 간직하며 살 것입니다. 헤세의 데미안,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카뮈의 이방인은 또 어떤가요. 젊은 시절, 그들을 읽으며 인생을 고뇌했던 때가 그립지 않습니까? 저 개인적으로는 2006년 수상자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에 매료되어 이스탄불 골목골목을 걸어서 ‘탐험’했던 때가 여러 번입니다. 그의 ‘순수박물관’은 여주인공 퓌순을 집착에 가깝게 사랑한 케말의 삶을 통해 그들이 함께 살았던 시간과 공간을 추억하는 소설인데,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와는 별도로 이스탄불과 이전 시대에 대한 파묵의 헌정시이기도 합니다.
최초의 대중가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고도 딜런은 그저 ‘쿨’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수상작 발표가 된 다음 열린 공연에서 그는 그저 노래만 불렀다고 하고, 노벨상위원회의 전화조차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노벨상 시상식장에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 상을 거부할 가능성까지 언급되고 있습니다. 한 편에서는 ‘딜런답다’는 말이 나옵니다. 미국에서 최고의 명예인 ‘자유의 메달’을 오바마 대통령에게 받을 때도 그는 표정에 변화 하나 없이 무뚝뚝하게 서있었으니까요.
“어떤 이들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야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얼마나 여러 번 외면하고 못 본 체할 수 있을까 …,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걸 알게 될까 ….” 하기야 이 정도의 글을 쓰는 사람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환하게 웃으며 축배를 드는 모습은 낯설기도 합니다. 여전히 세상은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들끓고 있고 흰색 비둘기들은 모래 속에 둥지를 틀며 편안히 잠들기에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니까요.
대전MBC 사장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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