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는 미다
최근에 읽은 한 회고록의 제목입니다. ‘거리(距離)는 미(美)다’, 제목에 이끌려서 읽기 시작한 책은 다른 회고록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이제는 팔순에 접어든 전직 고위 관리의 글에는 가난했던 어린 날의 이야기부터 고관으로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했던 시절의 이야기가 가감 없이 담겨있었습니다. 10대 중반 젊은 날, 그는 길을 걷다가 앞서 걷던 여학생의 뒷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뒤따라갔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얼굴을 보니 그가 생각하던 모습이 아니어서 크게 실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핏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화인데, 그는 큰 깨달음을 얻고 ‘거리는 미다’라는 말을 되뇌면서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살다보면 그가 젊은 날 맵시 좋은 소녀의 뒷모습에 이끌려 설렌 마음으로 따라갔던 것처럼 우리 인생에서 뒷모습에 끌려가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요? 때로는 그의 사회적 지위에, 때로는 그의 평판에 이끌려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하고 그의 팬이 되기도 합니다. 멀리서 보는 그 모습은 본질도 아니고 우리 존재를 규정할 만큼 중요한 부분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습에 끌려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게 되는 것이지요. 맵시 좋은 소녀의 뒤를 따라가는 시간동안은 인생이 아름다울지도 모릅니다. 멋진 체구를 가진 남성의 뒷모습을 감상하며 걸어가는 시간동안은 다른 고민거리를 잊어버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가까이 가면 그 대상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상상 속에 있었던 모습은 완벽한 존재이지만 실제 접하는 모습은 영 딴판일 수가 있지요.
며칠 전에 만난 A, B 두 사람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가끔씩 행사장에서 ‘안녕하세요’라며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던 사람들이 었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한참을 가까이 보낼 기회가 있었습니다. 1박2일 동안 단체 여행을 하면서 식사도 하고 장시간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여러 번 만났지만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 드러났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은근히 드러내려 하던 A에게서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감정이 수시로 그의 말투에 묻어났습니다. ‘첫인상 0.017초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B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굉장히 얌전한 사람으로 기억했던 그는 가까이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자 상당히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직설적인 화법에다 자기주장도 강했습니다.
그러니까 ‘거리는 미다’라는 이야기는 멀리서 보는 모습의 착시 현상을 경계하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 외모만의 이야기가 아니겠지요. 멀리서 보면 근사하게 보였던 사람들도 같이 일을 해보면 뜻밖의 결점과 단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앞서 언급한 A와 B를 보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뒷모습으로 기억될까 궁금했습니다. 소문이든 평판이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타인의 평가이든, 그것은 사실과는 차이가 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멀리서 보았을 때 멋지게 보였던 여학생이 가까운 거리에서는 다르게 보인 것처럼 그 역도 성립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보지 못하던 아름다움을 가까이서는 볼 수 있는 경우도 있지요. ‘거리는 미다’라는 말은 ‘거리는 착시다’라는 말로 풀이할 수 있을까요?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일은 시청자들에게 이 ‘거리’를 좁혀주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멋지게 보였던 국회의원이 알고 보니 ‘서민의 대변자’가 아니었다든가, 최고의 스타였던 그가 사생활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든가 하는 일들은 언론이나 방송이 아니면 쉽게 드러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아름답게 보이는 거리를 좁혀서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일들이 우리의 할 일이라는 거지요. 다른 한편에서는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아름다운 사람들을 찾아내서 보여주는 역할도 방송의 역할일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은 기쁨이니까요.
대전MBC 사장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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