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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의창

양극화의 시대

양극화의 시대

바야흐로 양극화의 시대가 온 것 같습니다. 양극화 논쟁은 뭐니 뭐니 해도 경제에서 먼저 시작되었지요. 마이클 샌덜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이유는 한국 국민이 사회·경제적인 공정성을 더 원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경제민주화’라는 단어가 유권자에게 어필한 것 역시 경제적 양극화가 불러온 현상이라는 설명도 있지요. 부의 세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금수저-흙수저’라는 말은 경제적 양극화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부가 대물림되는 현상은 조사 결과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미국의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가 포브스 억만장자들을 분석했다고 하는데요, 자산 10억 달러(1조 2천억 원) 이상 부자 가운데 상속 부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한국이 5위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갑부’의 74%가 상속부자라는 것이지요.

 

한국보다 서열이 높은 나라들은 석유 부국인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가 있었고 북유럽의 부국 핀란드와 덴마크였습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났다는 말이 나올 법 합니다.


양극화 현상은 경제에 그치지 않고 정치 쪽으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지난달에 치러진 오스트리아 대선 결선투표에서는 극우정당 자유당의 노르베르트 호퍼가 49.7%를 득표해 충격을 주었습니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중도정치의 사망선고”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뿐인가요? 미국에서는 온갖 막말을 쏟아낸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고 민주당에서는 자칭 사회주의자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필리핀 대선에서는 극단적인 공약을 쏟아냈던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정치의 양극화는 경제적 양극화가 몰고 온 현상이라는 분석이 우세합니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 덜 가진 자는 덜 가진 자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불만으로 극단적인 정강을 표방하는 정당들에 지지를 표한다는 겁니다..


최근에는 ‘양극화’ 현상이 감정의 영역까지 확산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다른 차량 운전자가 자신에게 경적을 울렸다는 이유로 그 차를 막아 세우고 몽둥이를 꺼내“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한 사건이나 앞에 가던 차량이 급제동을 했다고 모의 총기를 꺼내 이마에 겨냥하고 협박한 것도 실제 있었던 사건입니다. 도로 위의 분노라는 뜻의 로드 레이지(Road Rage)는 날로 증가해서 하루 평균 난폭·보복 운전이 17건씩 발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분노 현상은 한 발 더 나아가 ‘묻지마 범죄’ 현상으로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화장실에 간 여성을 이유 없이 살해한 ‘강남역 살인사건’은 조현병자가 저지른 사건으로 결론이 났지만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뒤로도 길 가던 여성 두 명에게 몽둥이를 휘두른 일도 있었고 지하철에서 침을 뱉지 말라고 했다고 칼을 꺼내 승객들에게 협박을 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드러난 ‘여혐’, ‘남혐’ 현상도 우려할 만한 것입니다. 온라인상에서는 ‘김치녀’, ‘된장녀’, ‘맘충’으로 여성에 대한 혐오의 글이 확산되었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한남충’, ‘개저씨’가 등장하면서 남성과 여성간의 대치와 갈등으로 비화되는 느낌입니다. 오프라인의 세계, 그러니까 현실세계에서 발생한 상황은 온라인에서는 더욱 과장되어 확산될 가능성이 크지요. 익명이 보장되는 웹에서 갈등과 분노는 증폭됩니다. 자식에게 지나친 애정을 표현했던 어머니는 ‘맘충’이 되고 교양이 부족했던 직장의 남성 동료는 ‘개저씨’가 됩니다. ‘맘충’, ‘김치녀’, ‘개저씨’로 표현하면 그 대상들은 더욱 증오, 혐오, 배제의 대상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인터넷이 긍정적인 역할을 한 부분도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급하게 희귀 혈액을 구해야 할 때 사회관계망(SNS)을 통해서 중태에 빠진 사람을 살리거나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한 모금 활동이 웹에서 벌어질 때 우리는 집단지성이나 집단선의를 목격하게 됩니다. 최근에는 취재비가 필요할 때, 제작비가 필요할 때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모금을 하기도 합니다. 반면 SNS의 그늘이 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면서 집단 왕따를 시키기도 하고 결국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감정이 확 솟구치거나 확 사그라지는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를 애도할 때도 그렇고 누군가를 매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감정이 시키는 대로 확 쏠렸다가 금세 사그라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진중하다거나 신중하다는 단어가 ‘사어(死語)’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극단적인, ‘양극화의 세계’를 목격하면서, 제 판단이 틀리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 또한 얄궂은 일입니다.

 

대전MBC 사장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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