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EO의창

임계점

임계점

어제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만난 분의 이야기에서 기억에 남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임계점’입니다. 물리학에서 ‘임계점’은 “물질의 구조와 성질이 다른 상태로 바뀔 때의 온도와 압력”이라고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임계점이 물리학이나 수학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흔히 물은 100도씨에서 끓는다고 하면서 임계점을 설명하곤 하는데, 우리 인생에서도 수많은 임계점이 있다고 하지요. 끓기 전까지의 물은 액체이지만 끓은 다음의 물은 기체로 변화해서 전혀 다른 모습과 성질을 가지게 되는데,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공학도였고 일생을 같은 분야에서 종사해왔습니다. 그 분야에서 많은 업적도 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예술과 운동에 빠졌습니다. 5년 정도 연습하고 시작한 첼로는 초보 단계를 넘었고 서예는 수준급에 이른다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물론 아마추어로서 이야기입니다. 때늦은 예술 공부는 컴퓨터공학도의 인생 사이클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한두 시간씩 첼로를 연습한다고 합니다. 서예의 경우에는 한시 공부라는 부가적인 기쁨을 맛보게 해준다고 하네요. 순조와 철종 때의 문신 이양연(1771~1853)의 ‘야설(野雪: 들판 위의 눈)’은 쓸 때마다 의미를 되새긴다고 합니다. “눈을 뚫고 들판을 걸어갈 때, 적당히 대충대충 걷지 말거라. 오늘 아침 내가 걸은 이 발자취가, 뒤에 오는 사람에게 길이 되느니.”


“그런데, 검도는 아직 임계점을 넘지 못했어요. 임계점을 넘으면 중단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거든요. 첼로나 서예는 임계점을 넘어서 혹여 중단하더라도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겠지만 검도는 그 단계까지 가기가 힘이 드네요.”


그러니까 사람에 있어서 임계점이란 터득을 해서 잊어버리지 않게 되는 지점을 말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이루는 사람은 임계점을 넘는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시도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외국어를 배우고 어떤 사람들은 서예를 시작하고 어떤 사람들은 다이어트를 시도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집니다.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으로 말이지요. 시작은 담대합니다. 매일 학원을 다니고 외국어 단어를 연습하고 리스닝을 시도합니다. 하루에 두 시간씩 달리기를 한다고 결심하고 일주일을 집중합니다. 댄스를 배워보겠다고 스텝을 연습하기도 합니다. 일주일, 이주일, ...그러다가 지칩니다. 하루 정도 걸러보고, 이틀 정도 바빠서 빠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하지’라며 스스로 합리화를 시도하고 결국 그것은 없던 일이 되어버립니다. ‘임계점’을 넘지 못한 것입니다. 100도씨가 되기 전에 연료가 닳아버린 것입니다.


제 경우에는 아랍어가 임계점을 넘은 사례입니다. 1989년에 처음 중동 취재를 하면서 이 지역을 제대로 취재하려면 언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아랍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은 한국외국어대학교 한 군데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회사를 다니면서 아랍어를 배우겠다는 생각은 포기해야 했지요. 인터넷도 없었고 아랍어 학원은 물론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93년에 미국으로 연수를 가면서 처음 아랍어와 제대로 접하게 되었습니다. 3대 난어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아랍어를 1년 만에 마스터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아랍어 임계점을 넘은 것은 2000년 다시 미국으로 연수를 가서 석사 학위를 받았던 때였습니다. 미국에서는 지역학을 하려면 반드시 언어 능력이 어느 수준을 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중동 지역을 연구하는 학생들은 반드시 아랍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때 집중적으로 아랍어를 공부하면서 임계점을 넘었습니다. 당시에는 아랍어로 짧은 논문까지 쓰던 정도였지만 지금은 많이 잊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것은 ‘임계점’을 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임계점을 넘지 못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임계점을 넘을 수 있는데, 직전에서 그만두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이 기체가 되지 못하고 그대로 물로 남게 되는 것이지요. 무언가를 배우겠다는 욕구가 나의 인생을 좌우할 만큼 ‘필요’할 때, 우리는 임계점을 넘게 됩니다. 그럴 때 ‘필요’는 ‘절박’의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임계점을 영어로는 ‘critical point’라고 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어느 분야에서 ‘임계점’을 넘었습니까?


'CEO의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마니’와 ‘싸요싸요’  (0) 2016.06.09
양극화의 시대  (0) 2016.06.02
안전한 나라  (0) 2016.05.19
“고객이 나를 먹여 살리지요”  (0) 2016.05.12
다시 이스탄불에서  (0) 2016.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