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31일, 정년퇴직을 했다. 33년 세월 동안 내 삶의 무대가 되어준 정든 회사를 떠났지만 대전MBC에서 보낸 내 젊은 날의 청춘들은 참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아있다. 지나온 방송 이야기를 글로 써서 퇴임식 때 출판기념회를 가져 볼까 하는 마음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편 쓰면서 추억을 먹고 사는 것 같아 그만 두었다. 퇴임식이 끝나고 사보 원고 청탁을 받았다. 여기에 “책 내어 볼까?” 하고 쓰기 시작했던 첫 원고를 싣고 싶다.
“계룡산 은선산장 할머니가 산새들과 대화를 나눈다”
지난 2001년 1월 새해 벽두부터 신선한 아이템이 입소문을 타고 바람결에 들려왔다. 은선산장은 동학사 입구에서 서쪽으로 약 2km떨어진 옛날 신선이 숨어 살았다는 은선폭포 옆에 자리한 대피소로 주로 계룡산을 찾은 등반객들에게 당귀차와 컵라면 등을 팔기도 하면서 조난객들의 구조를 돕는 곳 이었다.
“산장 할머니와 산새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그 모습이 궁금해 서둘러 촬영 스케줄을 잡았다. 당시 내가 제작하던 프로그램은 영상 다큐멘터리 “카메라 에세이”. 내레이션 없이 자막과 음악 그리고 현장의 모습을 그대로 전하는 5분 분량의 새로운 형태의 프로그램이었는데 밤 11시 시간대 방송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시청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촬영 당일 아침 눈을 떠보니 밤새 눈이 수북이 내려있었다. 당시 촬영감독은 은퇴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기술국 김시종 선배였는데 산을 좋아하는 카메라맨이었다. 우린 일단 계룡산 입구로 향해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요즘은 촬영 장비가 작고 성능이 좋아 위험한 곳도 짐을 줄이면서 촬영에 임하지만 당시 촬영 장비는 너무 무겁고 뒤따르는 짐도 많아 어려움이 많았다.
“유PD 어떻게 할 거야. 다음에 다시 올까?” 카메라 선배가 물었다. 눈 덮인 계룡산! 아무도 밟지 않은 산길, 그곳에 산새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할머니... 너무나 궁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날 뭐라도 찍어가지 않으면 방송 펑크도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선배님! 이런 기회는 다시 오기 어려워요. 제가 저기 가게에 가서 아이젠 사올께요.” 카메라 김 선배와 나, 그리고 오디오맨, 우린 그렇게 눈 덮인 계룡산을 미끄러지며 올랐다.
은선산장에 도착해 보니 할머니는 묵어가던 등산객에게 새들에게 뿌려주라며 옥수수 알갱이를 비닐봉지에 넣어 쥐어 주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올라왔어? 미끄러워 다치면 어쩌려구.” 할머니는 우릴 반갑게 맞아 주셨다.
당시 김기순(74) 할머니는 산을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 산신령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할아버지와 함께 조난당한 등반객을 30여명이나 구했고 일본 후지산과 미국 요세미티를 등반한 경력도 소문이 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할머니를 만나러 갔던 2001년 당시에는 함께 산장을 지키던 할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산을 내려가시는 바람에 할머니 혼자 산장을 지키고 있었다.
계룡산 은선산장은 은선폭포를 찾아 자살하려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아와 잠시 생각에 잠기는 곳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할머니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막다른 골목에서 생을 마감하려는 이들의 눈빛을 읽어 내곤 마음을 달래주는 역할도 짬짬이 하고 있었다. 당시 산 아래 동학파출소에 할머니의 다급한 전화 목소리가 “빨리 빨리...” 하면 목숨 건진 것이었고, 나즈막이 “또 수고 좀...” 하시면 이미 운명을 달리한 상황이었다.
은선산장에서는 새벽 3시경이면 아래 동학사에서 들려오는 범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밤새 할머니의 인생 상담을 듣던 이들이 계곡을 타고 올라오는 그 범종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다가 날이 밝아 산을 내려갔다는 이야기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눈 덮인 계룡산에서 먹이 구하기가 쉽지 않은 새들이 먼저 할머니를 찾아왔단다. “날이 밝기도 전에 새들이 와서 나를 깨워. 유리창을 부리로 톡톡 쪼면서 밥 달라고.” 할머니의 설명을 듣고 촬영을 하려했지만 낯선 인기척에 새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까 아침 다 먹고 갔는데...” 아뿔사! 푹푹 빠지는 눈길을 뚫고 올라왔는데 큰일이었다.
“가만있어봐, 녀석들이 땅콩을 좋아해... 내가 휘파람 불면 오니까 땅콩으로 유인해 볼께.”
할머니가 휘파람을 불자 박새들이 주변으로 모여 들었다. 하지만 커다란 카메라가 총처럼 겨누고 있고 낯선 사람이 세 명이나 할머니 곁에 있으니 녀석들의 경계가 심했고 카메라도 초점을 맞추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산에서 살아도 사람과 동물과의 교감은 쉽지가 않다. 산을 오를 때 가끔 마주치는 동물들은 사람에게서 살기를 느껴 도망친다. 그러나 산과 사람이 하나가 되면 더 이상 그 사람에게서 살기를 느끼지 않기에 친구가 되기도 한다. 언젠가 법정스님 책에서 폭설로 산토끼 한 마리가 스님 암자에서 하룻밤 묵어갔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오랫동안 산에서 사신 은선산장 할머니도 아마 그런 추억이 있지 않았을까?
경계가 심해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박새를 촬영하기 위해서는 할머니와 우리에게 작전이 필요했다. 우리가 몸을 숨긴 채 할머니 손 쪽에 카메라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가 할머니 손에 쥔 땅콩을 녀석이 물고 늘어질 때 잽싸게 찍자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박새와 할머니 이야기는 방송이 나간 후 계룡산 캠페인으로도 편집돼 한 달간 매일 방송을 탔고 그 바람에 할머니는 산장을 찾아와 재현해 달라는 사람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매 순간들이 행복한 시간
지난 1983년 3월 대학을 갓 졸업하면서 20대의 젊은 나이에 대전MBC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올해 정년퇴직을 했다. 돌이켜 보니 매 순간들이 참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방송했던 수많은 프로그램 내용들은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 했다. “그동안 누굴 만나 뭘 하고 살았지?”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지나온 내 삶을 정리해 보면서 두어 달 전부터 지하 자료실에서 켜켜이 먼지 쌓인 테이프들을 찾아내 화면을 몇 컷씩 휴대폰으로 촬영해 컴퓨터에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최근 들어 방송 장비들이 너무 자주 바뀌고 이제는 카메라도 테이프도 없이 메모리 카드로 교체되고 있기에 지하 자료실 테이프들도 곧 플레이어가 없어 못 볼까 아쉬운 마음에 시작한 일이었다.
자료는 생각보다 너무 많았다. 그래서 고생하면서 제작했던 프로그램들과 추억이 아련한 것들을 우선 골라내 작업해 나가기로 했다. 화면을 다시 돌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 세월들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한 장면 한장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내 젊은 날의 청춘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소곳이 그곳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문득 자주 삽입했던 노래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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