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속에서
“어우, 김 선배. 고맙습니다. 뭐, 이것 가지고 축하를 받을려니...맞죠. 예, 예.”
“제가 지금 사무실에 들어갈 거거든요. 예, 국장님, 이제 거의 서울 도착해요.”
“하하하하하!”
“내 생각 하고 있어? 응, 사랑해!”
무슨 이야기냐구요? 맞습니다. 지난 주 열차에서 들은 소리들을 몇 개 받아 적은 내용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대화하는 내용을 왜 몰래 들었냐구요? ‘몰래’가 아니라 들으려 하지 않아도 들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소리를 낮춰서 얘기를 합니다. 하지만 목소리를 낮춘다는 건 시늉일 뿐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 대화 내용은 고스란히 들리도록 얘기를 합니다. 특히 전화 대화의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전화 대화가 짧게 끝나면 다행이지만 이것이 5분을 넘어갈 때는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정말 고역입니다. 머릿속으로 업무 계획을 할 때도 있고 창밖을 내다보며 풍경을 즐길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들으려 하지 않아도 귀에 꽂히는 타인의 전화 대화는 고문 아닌 고문입니다. 언젠가 한 번은 뒤에 앉은 사람이 “열차에 타서 심심하니까 통화를 하자”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경우도 목격했습니다.
열차를 타면 5분 안에 탑승 예절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옵니다. “전화 통화는 통로에 가서 하고 어린이들에게도 주위를 방해하지 않도록 가르치라”는 내용인데, 현실은 이 방송 내용과는 많이 다릅니다.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김 차관 만나서 어떤 내용을 전달했다거나 모 총장이 어쩌고 모 시장이 어쩌고 하는 등의 내용입니다. 자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심리는 살아있는 모양입니다.
저로서는 가장 괴로운 경우가 코골이하는 승객이 주변에 있을 때입니다. 심야 열차를 타면 이런 경우를 많이 만나게 되는데, 하차할 때까지 아주 괴롭습니다. 코골이 승객이
괴로운 것은 ‘리듬’의 불일치 때문입니다. 규칙적인 음과 높이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그래도 참아줄만 한데 코골이의 경우에는 대부분 불규칙적입니다. “큭 큭 큭, 크르륵...”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어떤 때는 “큭 큭 큭 크르륵...” 하다가 한동안 묵음이 계속될 때도 있는데, 이럴 때는 다음 사운드가 언제 이어지나 대단히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불안이 최고조에 달할 즈음 “크윽”하는 코골이 음이 나오면서 듣는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하지요.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본능의 반응을 느끼다보면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자신이 대단히 저급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지요.
언젠가 앞자리에 ‘코골이’ 승객이 앉았는데,너무 괴로운 나머지 화장실 가는 척 하면서슬그머니 의자를 친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잠시 주춤하다가 또다시 원상복귀 하더군요. 한 번은 그 호차가 떠나가도록 코를 고는 사람이 있었는데, 너무나 괴로워서 그 승객을 깨운 적도 있었습니다. 코골이 승객도할 말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연발생적’인 현상인데 본인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이지요. 그런데 자신의 행동이 주변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다면 어쩌겠습니까. 잠을 자지 않도록 해야지요. 그런 승객의 경우에는 스스로 복도 칸에 나가서 잠을 자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싶습니다.
열차를 타는 일이 이렇게 괴로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운 좋게 ‘코골이’도 없고 ‘전화 고문자’도 없는 때는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보는 사치를 누립니다. 봄날에는 개나리로 시작해서 벚꽃, 사과꽃, 복숭아꽃이 만발한 들판을 지나기도 하고 파릇파릇 눈 뜨는 들판이 황홀할 때도 있습니다. 비 내리는 날에는 몇 십 년 전 과거로 생각이 흘러 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반가운 사람을 우연히 역에서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전역의 칼국수 가게에서 구수한 칼국수 국물 맛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입니다. 또 성심당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한 빵 냄새는 ‘달달한 고문’이기도 합니다. 대전이라는 도시가 ‘칼국수’와 ‘빵’을 전국적인 축제로 만드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만남과 떠남의 장소,역은 인생의 정거장이고 열차 칸은 세상의 축소판인가 봅니다.
대전MBC 사장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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