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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의창

봄과 색

봄과 색

봄입니다. 사무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봄으로 가득합니다. 가로수는 활짝 핀 벚꽃들입니다. 갑천 변에는 겨울을 이겨낸 풀들이 초록색 함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군데군데 개나리 덩굴들은 온몸으로 황금색 꽃들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갑천의 물결도 두 달전 겨울 풍경과는 사뭇 다릅니다. 오늘 찰랑대는 가벼운 물결은 우주 속에서 단 하나뿐인 물결입니다. 봄에는 색깔과 관련되는 기억들이 많습니다. 2006년 2월에서 2009년 2월까지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때입니다. 사무실은 워싱턴디씨에 있었고 살던 집은 자동차로 30-40분 거리의 버지니아에 있었습니다.

 


워싱턴은 버지니아와 메릴랜드가 땅을 절반씩 내서 만들어진 행정 수도인데, 백악관을 비롯한 정부 청사는 디씨에 있었지만 시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은 버지니아나 메릴랜드 등 교외였지요. 워싱턴과 서울의 시차 때문에 특파원들은 밤낮이 바뀌어 생활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녁 뉴스(당시에는밤 9시)를 제작하려면 현지 시간으로 새벽3-4시에 차를 몰고 디씨의 사무실로 갔습니다. 물론 그 전에 일어나 기사는 작성을 해놓은 상태였지요. 사무실에 도착해서 기사를 녹음하고 아직 어스름한 거리로 나가 스탠드업을 촬영해 편집을 한 다음 서울에 송고를 합니다. 그러면 아침 7시쯤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디씨로 출근을 하는 시간에거꾸로 퇴근을 하는 길, 4월 이맘때 조지워싱턴기념도로변에는 봄꽃이 곳곳에서 시선을 붙잡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은 개나리였습니다. 20-30분 동안 황금빛으로 늘어진 개나리꽃들을 보면 어느 시인이 이야기한 대로 황금빛 등불을 켜놓은 것 같았습니다. 이제막 밝아오는 아침의 햇살과 개나리가 뿜어내는 황금빛 색깔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슬픔도 묻어났습니다. ‘모든 순간적인 아름다움은 슬프다’라는 말이 있었던가요? 씨디 플레이어에서는 아므르 디압의 ‘타말리 마아크’가 흘러나왔습니다. “...당신을 잊지 못할 겁니다. 언제나 당신이 그리워요. 당신이 나하고 함께 있을 때도...” 여기서 저는 류시화의 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대목을 떠올렸습니다. 사람의 언어는 달라도 감정은 같은 것인모양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에서 사막은 우물이 있기 때문이 아름답다는 말을 했지요.사막여행을 많이 했던 저는 이렇게 말을 하겠습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양귀비때문”이라고 말이지요. 1990년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이 있은 다음 이라크에는 전면 경제제재가 가해졌습니다. 이라크 상공은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되었지요. 항공편이 끊긴 다음 이라크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20시간이 넘는 육로 여행을 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국경에서 밤을 새는 일도 있었습니다. ‘국경의 밤’은 어둡고 춥고 외로웠습니다. 캄캄한 밤을 달래주는 것은 설탕을 듬뿍 넣은 ‘챠이’였습니다. 그렇게 피곤한 몸을 싣고 새벽녘에 바그다드를 향해 출발하면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사막 들판뿐이었습니다. 그런데 4월 무렵의 봄날 아침, 사막에는 핏빛처럼 빨간 양귀비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났습니다. 그렇게 황량하고 그렇게 무미건조한 공기 속에서 그렇게 열정적인 빨간색의 꽃들이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습니다. 가느다란 줄기로 떠받친 양귀비꽃들이 살랑살랑 몸을 흔들 때면 사막이 빨간 양탄자 같았습니다. 그런 장면을 만나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일상은 지루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피곤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어느 순간, 이런 장면을 만나면 한동안은 그 순간의 기쁨 때문에 견딜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장면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하루에 30분 정도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쉼표를 찍으려 노력하기도 합니다. 한 계절에 하루 정도는 삶 자체를 온전히 즐겨보는 것도 괜찮을것 같습니다. 미세먼지가 목을 텁텁하게 하고 일상의 업무가 우리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어도 하루쯤은 자신에게 휴가를 주는 것 말이지요. 꽃도 아름답고 풀도 아름답고 물도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봄입니다.

 

대전MBC 사장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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