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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같은 제주, 윗세오름에 오르다

방송기술부 소속으로 TV제작 음향을 담당하다 TV주조정실에서 송출업무를 시작한지 2년이 다 되어간다. 출근해서 늘 한 공간에 있다 보니 점점 활동 반경이 작아진다.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도 줄어든다. TV주조정실은 여러 TV신호들이 마지막으로 이곳을 거쳐 방송되는 곳이라 24시간 비울 수 없는 공간이다. 하루는 정상근무, 다음날은 야근을 한다. 이렇게 교대 근무를 하다 보면 가족행사 참여나 친구들과의 모임도 쉽지 않다.
2016년(단기 4349년) 2월 말, 갑자기 확 트인 곳에 가고 싶은 생각에 항공편과 숙소를 예약하고 정신없이 제주로 향했다. 제주공항에서 멀리 보이는 한라산은 반은 검은색, 반은 흰색으로 덮여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제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해서 중문까지 가는 740번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달려 제주 영실 등산로 입구(해발 1280m)에 도착하여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참고로 한라산(해발 1950m) 산행은 여러 등산로들이 있다. 성판악과 관음사 등산로는 정상에서 백록담을 볼 수 있고, 영실, 어리목, 돈네코 등산로는 윗세오름(해발 1700m)을 따라서 트래킹 할 수 있다. 영실 등산로는 유독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 중 하나다. 그 이유는 다른 등산로에 비해 비교적 짧은 등산로로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르는 길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올라갈수록 바람에 몸이 흔들린다. 윗세오름으로 향하는 길, 눈보라가 눈앞에 있는 모든 풍경을 삼켜 버렸다. 눈을 뜨기도 힘들어 한발 한발 걷기 어려웠다. 간절하게 오고 싶었던 마음은 사라지고 왜 이런 곳을 걷고 있나 하는 자괴감이 한발 한발 더 힘들게 만든다. 옷깃을 아무리 오므려도 매서운 바람이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게 한다.

 

탁 트인 설경을 보고자 했던 바람은 여지없이 거친 눈보라에 묻혀 버렸다. 다시 돌아 내려갈 수도 계속 오르기도 힘든 곳, 재난 영화에서 본 듯한 엄청난 눈보라에 괜한 심통이 나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간다. 투덜투덜 도착한 윗세오름 대피소(영실, 어리목, 돈네코 등산로가 만나는 곳)에서 컵라면 하나에 꽁꽁 언 몸을 녹인다.

 

 

 


영실 등산로로 시작하여 윗세오름에 잠시 머문 후 어리목 등산로로 하산했다. 내려오는 길도 매서운 눈보라에 겨우 앞만 보였지만 아쉬움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한다. 계속 한숨만 쉬면서 말이다.


어리목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날씨가 화창하다. 힘들게 오르던 윗세오름과는 딴 세상이다. 허, 이런 것이 사람의 힘으로 어찌하지 못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일까? 멋진 설경은 사진으로만 보여주고 나에게는 꽁꽁 숨겨 버렸다. 보고자 했던 것은 없고 꽁꽁 언 손과 발이 오늘 무엇을 했는지 보여준다. 숙소로 오는 길에 한참을 정류소에 머물다 버스에 올랐다. 얼마 후 버스에서 천천히 몸이 녹는 것처럼 점점 닫혀 있던 가슴이 열렸다. 내일은 꼭 눈부신 한라산 설경을 볼 수 있으리라.


다음 날, 출발 전에 날씨부터 확인하고 아이젠과 스틱을 챙겨 전날 하산했던 어리목 등산로로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바람은 조용하고 날씨도 화창했다. 윗세오름을 향해 오르는 길, “와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난다. 눈보라에 숨겨 놓았던 설경이 정신을 놓게 한다. 힘들고 춥다고 다시 찾지 않았다면 이런 멋진 풍경을 보지 못했으리라. 바람에 만들어진 멋진 조각품들이 나무마다 매달려 있다. 산을 찾은 사람들마다 탄성을 내지른다.


어떻게 윗세오름에 올랐는지... 눈 덮인 한라산은 정말 아름다웠다.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로 그곳은 나에게 모든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고통스러웠던 마음속의 시끄러운 소리들이 잠잠해졌다.


아름다운 꿈을 꾼 듯 이제 나는 작은 공간에서 다시 시작한다. 봄을 재촉하며 꽃들이 피고 있다. 어두웠던 겨울 풍경을 밀어내듯 파릇한 새싹들이 올라오고 있지만 벌써 겨울이 기다려지는 것은 왜일까?

 

최성훈 | 경영기술국 방송기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