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의 고향 ‘충청도’
나의 몸과 마음의 고향은 충청도다. 친가는 충남 공주시 우성면이고, 외가는 맹씨 행단이 있는 아산시 배방읍이다. 충청도 특유의 피와 정서가 흐르는 가운데, 대전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창시절을 보냈다. 동네에서는 심성이 착한 합판집 아들이었고, 학교에서는 임원을 도맡아했던 모범생이었다. 대흥동 주택가와 인동 건축특화거리는 유년 시절을 잠시 지냈던 아련한 곳이고, 산 좋고 공기 좋은 중구 호동은 소년 시절을 보낸 그리운 곳이다.
지난 2000년 대전MBC에 입사하면서 고향은 다시 나를 불러들였다. 말재주가 없었던 내가 어울리지 않게 마이크를 잡게 되었다. 그 전에 1년 정도 강원도에서 마이크를 잡았기에 낯선 것은 아니었지만, 하면 할수록 두려웠던 것이 바로 방송이었다.
제일 처음 마주하게 된 프로그램은 <선택 즐거운 TV>. 입사하자마자 바로 투입됐으니 지금도 그 프로그램을 보면 웃음도 나오고 부끄럽다. <선택 즐거운 TV>를 시작으로 <내 고향 청풍명월>, <생방송 금요매거진>, <NOW>, <출동 6mm 현장 속으로>, <활력충전 GO>, <건강플러스>, <생방송 전국시대>, <전국이 보인다>, <생방송 아침이 좋다> 등 수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돌이켜보면 열심히는 했지만 스스로 잘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틀리지 않으려고 방송하는 사람처럼 여유도 없었고, 서민들의 희로애락을 내가 느끼고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연륜이었다. 물론 모두 나에게 든든한 자양분이 된 소중한 프로그램들이었다.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많은 선배들과 게스트로 나왔던 분들은 내 삶에 있어 멘토가 되어주기도 했다. 방송은 함께 만들어간다는 진리를 몸으로 깨달았던 청년기였다.
앵커의 신뢰감이 곧 방송사의 이미지
2000년 가을 <630뉴스> 앵커를 맡으면서 앵커의 삶을 산지는 16년이 되어간다. 입사 초에 느꼈던 선배들의 뉴스 리딩은 안정감과 무게감, 그리고 다소 예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나의 뉴스 리딩은 전통적인 안정감에 자연스런 톤을 입힌다는 목표도 그때쯤 생긴 것 같다. 정통이 아닌 앵커들이 보여주었던 불안정감과 아나운서 선배들이 보여줬던 평이함을 탈피하려는 몸부림은 16년째 계속되고 있다.
대전·세종·충남지역에서 임세혁이란 이름 앞에는 항상 대전MBC 아나운서란 타이틀이 따라 다닌다. 이제는 TV에서 봤던 사람이란 이미지보다는 ‘방송 참 잘해’란 말을 듣고 싶다. 인지도보다는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고, 방송에서 어떤 말을 해도 신뢰감을 주는 인물이 되고 싶다.
충청도 사람들은 자신의 큰 욕심이 있어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함부로 하지 않고, 큰 것도 아니면서 큰 것인 것 마냥 허세를 부리지도 않는다. 지역의 시청자도 마찬가지다. 저 진행자가 얼마만큼의 내실과 성실함을 갖고 있느냐를 비교적 오랜 세월에 걸쳐 지켜보고 판단한다. 그렇게 쌓인 감정이 바로 아나운서나 앵커의 신뢰감이 되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방송사의 이미지가 된다.
<대전MBC 뉴스투데이>는 이제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만 11년째 아침 7시대면 어김없이 임세혁이 나온다. 함께 진행했던 여자 아나운서만도 10명이 되어간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뉴스 하는 아나운서로 많이 기억해 주신다. 시청률은 제법 나오기 시작한다. 최근 들어 두 자릿수 시청률을 종종 기록하는 것은 물론이고, 동시간대 1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많은 분들에게 고맙다. 우선 아침에 대전MBC 채널을 고정해 꾸준히 봐주시는 시청자 여러분이 고맙고, 많은 양의 뉴스를 제작해주는 기자와 카메라기자, 뉴스PD들도 고맙고, 예쁘게 분장해주고 머리를 만져주는 분장실 식구들도 고맙다.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하게
<대전MBC 시사플러스>는 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프로그램이었다. 40대 초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것은 부담스런 도전이었지만, 함께 출연하는 PD 선후배들이 있었기에 조금은 편안한 기분으로 3년간 진행해 왔다. 늦은 밤에 편성된 핸디캡은 안고 있지만, 열심히 아이템을 찾고 촬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제작진들의 노력을 보면서 그동안 조금은 등한시했던 지역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는 좋은 시간이 되는 것 같다.
방송 매체는 TV 이외에도 라디오라는 또 하나의 송출 수단이 있다. 아나운서라면 라디오 진행의 맛과 멋을 알기에 늘 좋은 프로그램 하나쯤은 진행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라디오 청취자만큼 한번 애정을 가지면 웬만해서는 변심(?)을 하지 않는 그룹도 없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MBC 본사에 경쟁력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들이 많아서 대전MBC 또한 로컬 프로그램에서 최선을 다하면 ‘왕 애청자’가 많다는 점이다. 입사 후에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은 <별이 빛나는 밤에>, <푸른신호등>, <FM 모닝쇼> 등이 있다. 그리고 지금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자 의학 실시간 상담프로인 <3830 상담실>은 방송 중간중간 나의 모든 것이 애드리브를 통해 고스란히 알려지기도 한다. 라디오 고정 청취자라면 나의 성격과 됨됨이를 많이들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한다. 그것이 라디오의 힘이자 두려움이다.
인기 연예인이 출연을 거의 안하는 로컬 방송사. 국영 방송사와 민영 방송사라는 두 경쟁사 사이에서 대전MBC는 늘 극한 생존 경쟁에 내몰려 있다. 좋은 콘텐츠가 좋은 반응을 몰고 온다는 진리는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로컬 방송사에서 신뢰감은 가장 소중한 방송사의 힘이다. 신뢰감의 최일선에 서있는 진행자는 부담 백배이다.
로컬 방송사의 아나운서는 카멜레온 같아야 한다는 말을 종종 하고 듣는다. 정확하고 똑부러지는 진행이 필요한 뉴스 진행, 프로그램의 성격에 따라 분위기를 리드해야 하는 교양 및 오락 프로그램 진행, 단정하고 깔끔함이 필요한 시상식 및 개막식 프로그램, 편안함과 인간미를 필요로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생생함과 애드리브의 산실인 스포츠 중계 프로그램. 이 모든 것에서 나는 벌거벗은 마음가짐으로 경건하게 시청자와 청취자를 대해야 한다.
느리게 반응하지만 누구보다 신중하고, 사람을 판단함에 한두 달이 아닌 몇 년을 두고 지켜보며 판단하는 충청의 지역민들. 나또한 그런 성격이기에 신뢰감으로 그들과 교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고 있다. 서로의 믿음과 소통, 정보의 신뢰성을 바탕으로 방송사의 선호도를 결정하는 시청차와 청취자. 눈 가리고 아웅 식의 형식적인 멘트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삶의 태도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언뜻 각박해 보이지만 한번 신뢰가 쌓이면 교감이라는 달콤한 행복이 찾아오기에 오늘도 난 충청 지역민들과 부끄럼 없이 교류하고 신뢰감을 주기 위해 노력하련다.
임세혁 아나운서 | 편성제작국 제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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