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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디자인하는 일

영국의 어느 세트 디자이너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디자인한 세트에 조명이 밝혀지고 배우들의 연기, 분주히 움직이는 카메라가 어우러져 살아 움직이는 공간이 되는 광경은 내가 본 어떤 훌륭한 미술품보다도 더 감동적이다.” 세트나 무대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공감 가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살아 움직이는 공간. 불 꺼진 스튜디오는 죽어있는 공간이다. 더구나 새로운 세트를 기다리고 있는 텅 빈 공간은 그냥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다. 그래서 세트 디자인은 공간을 디자인하는 일이다. 목적은 단 한 가지, 시청자들을 위해 프로그램에서 요구하는 공간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시각화하는 디자인 작업이다.


우리 인간은 공간 안에 존재한다. 즉,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 환경에 따라 인간의 이미지가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TV에 있어서 세트가 만드는 공간은 프로그램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그 속의 인물들을 돋보이게 한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도면에서 시작한 한 줄 한 줄의 선드로잉이 공간속에 입체로 살아나 출연자와 어우러져 방송된다.

 

 

 

 

 


연휴 마지막 날이었던 2월 10일, 여유 있는 마음으로 잠시 회사에 나와 이것저것 정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TV제작부장님의 면담 요청! 외부업체에 맡기기로 했던 코이카 박람회의 메인 무대를 우리가 직접 하게 됐다고 하신다. 마음 편하게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비상등이 켜진다. 재빨리 스케줄부터 확인! 생방송은 20일 12시 10분이지만, 당일 오전 9시부터 행사가 계속 이어지니 오늘과 당일 빼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9일.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부족한 시간은 언제나 우리 친구였기 때문에 최상의 결과를 위해 바로 스타트. 무대 규모를 파악하고 출연진의 인원수, 댄스팀은 있는지 등을 추가 확인했다. 이번에는 방송 당일뿐만이 아니고 계속 무대를 사용해야하는 상황이었다.


2월 11일(D-9). 장치감독과 현장을 방문해본다. ‘그냥 텅 빈 공간, 하지만 9일 후면 꽉 차게 될 것이다’라고 되뇌어 본다.


2월 12일(D-8). 기본적인 무대 구성과 디자인을 완성하고 김봉선 장치감독과 일차 토의, 제작시에 어려움은 없는지 파악하고 디자인을 수정한다.


2월 14일(D-6, 일요일). 방송일하는 사람치고 주말에 일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단 방송이 먼저니까... 주말에 피치를 올린 덕분에 무대디자인은 나왔지만 다 모여서 스태프회의를 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 아직 결재도 못 받았다. 전화통화로 무대 바닥팀, LED팀, 조명팀 연락해서 이메일로 도면 보내주고, 한마디 덧붙인다. 아직 결재가 안 끝난 상태이니 참고만 하시라, 수정될 가능성도 많다.


2월 15일(D-5). 도면을 갖고 TV제작부장님과 협의, 몇 가지 수정사항이 나온다. 방송 무대 디자인은 아티컬(artical)하기도 하지만 지극히 여러 요구를 수용해야 하기도 한다. 혼자만의 예술세계 속에 빠지면 위험하다. 각 분야 전문가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야한다.

 

2월 18일(D-2). 무대 바닥 시공팀이 9시에 현장 도착, 몇 가지 작업 방향 잡아주고 시공 시작, DCC는 실내공간이고 회사와 가까워 수시로 다녀갈 수 있어서 작업환경이 좋은 편이었다.


2월 19일(D-1). 잘 시공된 바닥 위에 LED가 올라가야 한다. 바닥 작업이 일찍 끝나서 스케줄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꽃 박스, 타이틀 커팅 등 다른 팀과 동시에 진행 가능한 작업부터 시공, 오늘밤까지는 완벽하게 모두 완료되어야 한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2월 20일. 밖으로 나가는 스케줄은 녹화가 시작되면 디자이너의 역할은 거의 끝난다. 구름처럼 모여든 관객들 사이로 무대를 바라본다. 출연진, 가수들로 꽉 차있는 무대가 조금 낯설기도 하다.

 

 

 


생방송이 잘 끝나고, 엄홍길 대장의 토크 콘서트 녹화도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지나가면서 해주시는 ‘수고했어. 깔끔하네.’ 라는 말에 그동안의 어려움이 녹아내리면서 뿌듯함(?)과 안도감이 밀려온다. 이 공간은 우리가 다 철수한 후 다시 텅 비게 된다.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세트 디자인은 애써 제작한 디자인 작품들을 잠시만 감상하고, 곧바로 무너뜨려야 하는 일회성이 강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아쉬움과 허무함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해냈다는 성취감이 묘하게 이 일에 빠져들게 한다. 그래서 세트 디자이너들은 늘 새롭고 신선한 그림을 보여주고, 감각을 잃지 않도록 새로운 소재와 디자인 개발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