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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의창

영 웅

 

영 웅

지난 주말에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지방 어느 도시 외곽에서 버스가 눈구덩이에 빠지는 사고가 있었는데, 그가 18명 탑승객 중의 한 명이었답니다. 직접 겪은 데다 발생한지 얼마 안 되는 일이어서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얘기했는데, M스토리에 스물여섯 살 여성 영웅 이야기를 전달할까 합니다.


사고 당일 저녁 8시 10분 경, 산길을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길가로 처박혔습니다. 눈이 내려 결빙한 길을 달리다가 눈구덩이로 미끄러지면서 처박힌 것입니다. 순간 그녀는 이대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버스 내부는 비명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25인승 버스에는 18명 정도가 타고 있었고 얼굴과 입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사람도 몇 보였습니다. 그녀의 얼굴에서도 피가 흘렀습니다. 비명과 신음이 엉겨서 공포 분위기를 더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했습니다. 버스는 문짝이 찌그러져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한 여성이 일어났습니다. 20대(나중에 26세로 밝혀짐)로 보이는 여성이었습니다. 겨울 저녁 8시 무렵, 이미 해는 한참 저물었고 사고로 정전이 된 버스 내부는 사람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했습니다. 그녀는 핸드폰을 켜서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분, 진정하시고 제 말을 좀 들어주세요. 다친 분은 몇 분이 계시지만 다행히 목숨을 잃은 분은 없습니다. 문제는 2차 사고입니다.”


2차 사고라는 말이 나오자 승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버스의 불이 완전히 나간 상태에서 길 옆 비탈에 처박힌 상태라 자칫 뒤이어 오는 차가 버스를 들이받기라도 하면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니까요. 일부 승객들은 부서진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한 청년을 지목했습니다.


“자, 다치지 않은 것 같은데, 저 부서진 창틈으로 나갈 수 있겠어요? 나가서 뒤이어 오는 차를 세우고 버스 뒤에 삼각대를 세우게 해주세요. 할 수 있겠어요?”


젊은 여성이 젊은 남성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데, 거절할 남성이 있을까요? 게다가 18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습니다. 남성은 그러마고 하면서 부서진 창문을 넘어 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버스 주위에는 깨진 유리창이 흩어져 있었지만 그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했습니다. 신속한 조치로 뒤이어 오는 자동차 운전자의 협조를 받아 형광 삼각대가 설치됐습니다. 그러자 여성이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여러분, 다행히 삼각대가 세워졌습니다. 이제 2차 사고의 우려는 없습니다. 그러니 버스 바깥으로 나가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깥은 영하 10도의 추운 날씨이고 자칫 외부에 나가 있다가는 동상이나 동사 우려도 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2차 사고 우려에 동요하던 승객들은 모두 그녀의 말에 동의하고 차내에 남아있기로 했습니다. 설명은 길었지만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버스 기사에게 접근했습니다. 버스 기사는 사고의 여파인지 갈팡질팡 어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침착하게 사고 위치가 어디쯤인지 묻고는 119에 전화를 했습니다. 이제 구급차와 구조대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다치지 않은 젊은 여성 한 명을 지목하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종이와 펜을 주고는 승객들의 연락처를 일일이 받아 적으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있을 버스 회사와의 배상 협상에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구급차가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한 번 핸드폰의 불을 켰습니다. 그리고는 일일이 승객들의 얼굴을 비춰 보더니 순서를 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구급차 한 대에 탈 수 있는 인원은 4명, 구급차는 두 대밖에 없어 탈 수 있는 인원은 8명이니 순서를 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승객의 얼굴을 비춰 보고 부상이 심한 정도에 따라 순서를 지정해 주었습니다. 앞니가 모두 빠진 남자 승객이 1번, 얼굴을 심하게 부딪혀 출혈이 심한 남성이 2번으로 지목되었습니다. 그렇게 8번까지 구급차에 탔습니다. 다치지 않은 승객들은 다른 버스로 이동했습니다.


사고 발생부터 구조되기까지 그녀의 대처는 완벽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세월호’ 생각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세월호’에 그녀 같은 사람이 선장으로 있었다면 대한민국 해상사고 중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그 사고를 피할 수 있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18명밖에 타지 않았고, 사망자도 없었던 사고이기 때문에 이 사고는 큰 주목을 끌지 못했습니다. 언론, 특히 방송의 아이러니는 사망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주목을 끈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침착한 이 20대의 여성 영웅이 없었다면 사고는 더 큰 참사로 이어졌을지 모릅니다. 갑작스런 사고를 만나 침착하게 대처해서 더 큰 인명 피해를 막은 그녀 같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영웅이며 지도자입니다.


한편, 한 번쯤은 이런 사고를 만났을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를 미리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예기치 않은 사고’라는 표현도 있지만, 한 번쯤은 이런 상황을 인위적으로라도 가정해본다면 실제 그 상황이 발생했을 때 덜 당황해 하면서 수순에 따라 침착하게 행동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물여섯 살 당찬 그 여성을 만난다면, 크게 칭찬을 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이 영웅이라고.

 

대전MBC 사장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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