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8월입니다. 2015년은 절반을 훌쩍 넘겨 하반기에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우리나라는 ‘형제의 난’이다 뭐다해서 뉴스 홍수를 맞고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절의 시계는 돌아가서 본격적인 휴가철입니다. 시청자 여러분 가운데 상당수는 휴가를 다녀오셨을 것이고, 일부는 계획을 하고 계시겠군요.
제 경우에는 인생에서 기억나는 장면들 가운데 상당수는 휴가 때 찍혔던 것 같습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일상에서의 탈출’이다 보니 인상적인 장소를 택했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인상적인 경험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킬리만자로이군요. 그때는 일에서의 압박감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한겨울이었고 때마침 열흘간의 휴가를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킬리만자로로 간다!’ 이 생각이 떠올랐어요.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 등 기억에도 선명한 작품들을 남겼고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밍웨이는 그의 삶 자체가 소설처럼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이었습니다. 기자 생활을 했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했으며 스페인 내전 때 종군기자를 했던 헤밍웨이는 변화무쌍한 삶에 지치기라도 한 듯 62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삶의 유한성과 역동성을 동시에 그리고 있는 ‘킬리만자로의 눈’을 따라 그해 겨울 탄자니아로 떠났습니다. 준비한 것은 침낭과 20킬로그램이 넘지 않도록 꾸린 백팩 하나, 신고 있던 운동화 한 켤레였습니다.
수명이 20년밖에 안 남았다는 킬리만자로의 눈, 만년설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부부가, 때로는 연인들이, 때로는 모녀가, 그리고 삶에 지친 개인들이 킬리만자로에 왔습니다. 걷는데 자신 있었던 저는 5박6일 코스가 아닌 4박5일 코스를 선택했습니다. 첫날은 날듯이 산 중턱에 도착했습니다. 적도 부근에 자리 잡은 킬리만자로는 사시사철 여름 날씨를 보이지만 고도가 높아지면서 달라지는 기후와 함께 동식물의 종류도 달라집니다. 날아갈 듯이 상쾌했던 몸 상태는 사흘째가 되면서 몹시 피곤해지고 무거워졌습니다. 걷기 위해 또 배출을 극소화하기 위해 먹는 것을 최소한으로 줄였던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고산병이 어떤 것인지 점차 짐작하게 되던 때 마지막 날을 맞았습니다. 그날 밤에는 정상에 올라 해돋이를 보고 하산하는 일정이었습니다. 4일째 밤은 정상을 눈앞에 둔 로지에서 보냈습니다. 위장은 메슥거리고 머리는 어지럽고 구토는 이어졌습니다. 로지에서 상주하는 관리인은 병색이 완연한 저에게 하산을 권했습니다. 4일을 함께 했던 가이드는 힘들면 포기하는 게 좋다고 했지만 저는 정상을 눈앞에 두고 하산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산을 거부했지요.
5일째 0시쯤 백팩조차 벗어두고 정상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사방은 자갈에다 살얼음 조각 같은 것들로 덮여있었습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사흘째부터는 곳곳에서 살얼음을 볼 수 있었어요. 아프리카 최고의 산, 유일하게 만년설을 간직한 산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등산이 아니라 엎드려서 기어가는 형국이었습니다. 100미터도 못 가서 졸리기만 하고 그대로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만 싶은 상태, 그대로 누워있으면 천국으로 갈 것같이 안온하고 나른한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조난을 해서 사망하는 경우가 이런 것일까, 생각하는데 가이드는 자꾸 일어나라고 재촉했습니다. 킬리만자로에는 고산 트레킹에 서툰 이들을 위해 반드시 가이드와 동반해야만 입산을 허용하고 있는데, 이런 비상사태를 대비한 것입니다.
3-4미터 기어가다가 또 엎어지고 또 일어나서 가기를 반복하다가 또 엎어지고, 그러면서 돌아서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고산병으로 죽을 것이 뻔한 상태, 아무런 대의명분도 없이 자신의 정신력을 시험하려다가 사망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울음을 삼키고 돌아서니 분하기는 한데 마음은 가벼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산하면 할수록 몸이 개운해지고 날아갈 듯 가벼운 것입니다. 고산병은 고도를 낮춰주는 것만이 유일한 처방이란 걸 알았습니다. 4박5일 코스가 아니라 5박6일 코스를 택했다면, 남들이 하듯이 3일째 되는 날 하루 쉬면서 기후 적응을 했다면 몸에 심한 무리가 가지는 않았을 텐데 자연 앞에서 만용을 부린 대가는 ‘고산병’이라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을 주면서 자만했던 인간을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킬리만자로에서 헤밍웨이를 느끼고 겸손을 배웠습니다. 목표가 있으면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정신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기회는 언제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쉽게 잊히지 않은 여행 경험이 있을 겁니다. 여행이 신비로운 것은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겠지요.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 음식들, 풍경들...이런 것들은 우리 삶이 다할 때까지 마음속의 사진첩에 남아있습니다. 이번 휴가 때는 인상적인 풍경 하나 마음에 담아 오시기 바랍니다.
대전MBC 사장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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