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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가사람들

우리들의 영원한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

이리저리 자르고 요리조리 붙이면, 네모난 종이가 하늘을 나는 새가 되고, 빙그르르- 공기를 가르는 바람개비가 된다.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달랑 종이 한 장만으로 동네 꼬마들의 넋을 빼놓았던 ‘종이술사’ 김영만 씨가 <허참의 토크&조이> 녹화장을 찾았다.녹화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특유의 환한 미소로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김영만 씨. 지난 30여 년 간 갈고 닦아온 ‘종이접기 아저씨’의 친화력은 그야말로 명불허전. 거기에 더해진 의외의 입담은 두 시간여에 걸친 녹화 시간을 찰나처럼 느끼게 했다.

 

서른 넷, 종이접기하기 딱 좋은 나이
그가 종이접기의 세계에 발을 들인 건, 80년대 중반. 그의 나이 서른네 살 때의 일이다. 안정된 대기업 디자이너의 삶을 뒤로한 채, 새로운 사업 구상 차 찾았던 일본에서 우연찮게 한 유치원을 방문하게 됐고, 그 유치원 창문 너머로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색종이를 접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 그야말로, 인생이 뒤바뀐 한 순간이었다.

 

 

 

 

 

 

“그 길로 아버지를 찾아가 무릎을 꿇었죠. 아버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일 년만 도와주십시오. 일 년 안에 승부를 보겠습니다! 했더니 아버지가 물으시더라구요. 그래서 하고 싶은 게 뭐냐고요. ‘종이 접기입니다. 아버지!’ 대답했더니 한참 있다가 ‘뭐?’ 하시더라구요. 제가 무슨 얘길 하는지 아예 못 알아들으셨던 거예요.”


일 년이라는 빠듯한 시간. 거기다, 책임져야 할 처자식까지. 어깨에 얹힌 여러 짐들이 오히려 그를 더욱 채찍질했다. 그리고 1988년, 앞만 보며 달리던 그에게 운명처럼 <TV 유치원> 제작진으로부터 출연 제의 전화가 걸려온다.

 

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

<TV 유치원>의 종이접기 아저씨로 동네 꼬마들의 취미 활동을 책임진 세월이 무려 6년. 그 동안 아이들은 청년이 됐고, 자연스런 수순처럼 ‘종이접기 아저씨’를 잊었다. 그런데 지난 2015년, 마치 깜짝 선물처럼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등장한 종이접기 아저씨를 보며 2030세대는 환호했다. 얼굴에 진 주름살이 조금 더 깊어지긴 했지만, 그는 예전과 다름없는 목소리로 ‘코딱지들!’을 외쳤고 신통방통한 손재간으로 녹슬지 않은 종이접기 실력을 선보였다.

“다들 물어봐요. 아니 선생님, TV 유치원을 끝내고 20년 동안 대체 어디서 뭘 하셨어요? 뭘 하긴 뭘 해. 방송하고 강의하고, 예전하고 똑같이 살았지. 어릴 땐 내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열심히 보다가 나이가 드니까 내가 나오는 프로그램은 안 봤던 거야. 그래놓고 나한테 그 동안 뭘 했냐 물으면, 난 뭐라고 해야 하나요? 답을 하면서도 우스워 혼났어요.”


종이접기를 떠난 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게 된 시청자들이었을 뿐. 그는 30여 년 간 아이들과 종이접기를 떠난 적이 없었다.

 

 

 

 


아이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좀 더 자유롭고 여유로운 환경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던 김영만 씨. 지난 2009년, 사비를 털어 아이들을 위한 체험 미술관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이 체험 미술관은 오랜 시간 구상하고 고민해 만든 곳인 만큼, 종이를 들 힘이 남아있는 순간까지 계속 운영할 예정. 직접 아이들을 만나고 종이를 접으며 노는 일이 그에겐 그만큼 소중하고 중요한 까닭이다.


“아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전 요만큼의 거짓 없이, 단 한 번도 아이들이 많아 힘들다거나 귀찮다거나 싫다거나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과거는 시간의 힘을 빌려 사실보다 아름답게 채색된다. 그러나 그의 ‘종이접기’는 예나 지금이나 현재 진행형. 과거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았을 때나 지금이나, 그의 손끝에서 탄생해 ‘날리세요!’ 소리와 함께 빙그르- 돌아가는 바람개비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강미희 |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