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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의창

터키에서 길을 묻다



터키 보드럼에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파란 하늘빛은 그대로 바다에 떨어져서 에게해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로 만들었다고 하지요. 보드럼은 바로 그 에게해와 지중해가 만나는 터키 남서부 해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터키 정부의 초청을 받아 도착한지 닷새째, 이스탄불을 거쳐 어젯밤 이곳 보드럼에 도착했습니다. 묵고 있는 호텔은 에게해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전형적인 호텔이라기보다는 본관동에 3층짜리 건물 수십 개가 이어진 레지던스형 리조트 단지입니다. 레지던스 앞 가로수는 올리브 나무들입니다. 선선한 바람에 흔들리는 올리브 나뭇가지 사이로 작은 대추알만한 올리브 열매들이 송알송알 연한 초록빛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6백년 제국을 경영했던 오스만투르크는 1차 대전의 끝 무렵 케말 아타투르크의 혁명으로 제국을 마감하고 근대 터키로 거듭납니다. 한때 서쪽으로는 모로코로부터 동쪽으로는 아제르바이잔까지, 북쪽으로는 우크라이나에서 남쪽으로는 예멘까지 거대한 영토와 힘을 넓혔던 오스만투르크는 1923년 이름만 남아있는 변방의 영토를 털어내고 현재의 터키 영토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합니다. 터키의 역사를 보면 기이하게도 대한민국의 근세사를 떠올리게 됩니다. 1차 대전의 결과 무능한 제국은 종말을 맞았지만 무스타파 케말은 젊은 근대 국가를 건설했지요. 거대한 제국의 식민들은 제각각 크고 작은 나라를 만들어 독립합니다. 청년튀르크 혁명으로 집권한 케말은 15년 동안 터키를 근대화하면서 아직까지 터키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사망한지 77년이 지난 지도자의 얼굴을 터키 거리 곳곳에서 만나는 것은 묘한 느낌입니다.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 국민들에게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관공서에는 물론 보통 사람들의 가게에도 그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공원과 거리에는 그의 동상이 당연한 듯 버티고 서있습니다. 오늘 낮에 만난 30대 관광청 직원은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 터키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어있었을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터키 국민들에게 케말은 ‘아타 투르크’ 터키의 아버지입니다. 지갑에 그의 사진을 넣어 다니는 여성들도 꽤 많다고 합니다. 터키가 6.25때 한국에 파병을 했던 것은 그들이 겪었던 전쟁 때문이었을까요? 이곳에서 만난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백병전까지 하면서 한국을 지켜낸 경험담을 뿌듯한 어조로 이야기했습니다.


터키를 위대한 나라로 만드는 것은 이스탄불이라고 터키 국민들은 믿고 있습니다. 아침은 아시아에서 먹고 점심은 유럽에서 먹는다는 이스탄불은 터키의 보석입니다. 아시아 국가밖에 될 수 없었던 터키를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에 속하게 만든 것은 두 대륙을 품고 있는 이스탄불 덕분입니다. 터키 남서부의 수많은 섬들을 그리스에 양보하면서까지 이스탄불을 지켜냈던 것은 아야 소피아, 블루 모스크, 술레이만 모스크, 그랜드 바자르, 그리고 지정학적인 요충해역인 보스포러스를 가진 그들의 보물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이스탄불 등 주인에 따라 이름은 바뀌었지만 이스탄불은 정복자들이 모두 갖고 싶어 한 도시였습니다. ‘여러 겹의 베일을 쓴 여성’에 비유되는 이스탄불 곳곳에는 ‘이야기’를 담은 장소들이 많습니다. 도시를 정복했지만 기독교 사원을 파괴하지 않고 덧칠만 해서 모스크로 사용했던 아야 소피아는 이슬람의 합리적인 관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술레이만 대제가 건설한 모스크 옆에는 그가 “나의 친구, 나의 존재, 나의 바그다드, 나의 술탄”이라고 노래한 여인 록솔레나를 위해 만든 목욕탕이 아직까지 남아있습니다.


무능한 조상 때문에 제국은 무너졌지만 터키가 그 조상들이 건설한 유물 덕분에 살아가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관광국인 터키에

서 배우는 것은 관광이 단지 건물을 구경시켜주는 것만은 아니란 겁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유물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입힌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가진 건물에 이야기를 입히는 것, 우리가 가진 골목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기야 최근에 인기를 얻는 프로그램들을 보면 평범한 것에 이야기를 덧입히는 것들입니다. 요리 프로그램 하나를 만들면서도 식재료에 의미를 부여하고 노래 프로그램을 봐도 가면을 씌우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 스토리텔링은 그래서 21세기의 자산이라 불리는 모양입니다. 우리 지역에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거리와 장소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입히는 작업을 텔레비전이 해야겠습니다. 벌써 6월 말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달 7월은 메르스를 극복하고 가뭄 소식도 없는 평안한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대전MBC 사장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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