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EO의창

순수박물관


이번 주에도 터키 얘기로 시작합니다. 이스탄불이 아름다운 이유는 보스포스러를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거기에 신비를 더하는 것은 ‘순수박물관’입니다. ‘순수박물관(Museum of Innocence)’은 이스탄불의 한적한 뒷골목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4층짜리 건물을 들어가는 출입문은 1미터 폭이나 될까요, 마치 아는 이의 집처럼 익숙합니다. 그러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1층부터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한 여성에 대한 평생의 사랑의 흔적이 박물관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지요. 44일간의 사랑과 2864일간의 그리움의 흔적이 박제된 상태로 정지되어 있는 현장입니다.


박물관의 전시물들은 충격적입니다. 빛바랜 사진들과 앨범은 물론이고 그녀가 신었던 하이힐 구두들, 그녀가 입었던 화려한 원피스,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한 움큼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 인간이 일생동안 사용했던 모든 흔적과 시대는 4층 케말 바스마즈의 침실에서 끝이 납니다. 박물관 벽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2000년에서 2007년까지 케말 바스마즈는 이 방에서 살았으며, 오르한 파묵은 이곳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케말 바스마즈는 2007년 4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 대목에서 오르한 파묵을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순수박물관’은 오르한 파묵의 같은 제목 소설이면서 바로 그 박물관 이름입니다. 케말 바스마즈는 ‘순수박물관’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이며 ‘순수박물관’에 전시된 물건들을 수집한 사람입니다. 극적인 반전은 ‘순수박물관’에 전시된 물건들이 모두 다 ‘가짜’라는 것입니다. ‘순수박물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케말 바스마즈가 수집해놓은 물건이라고 생각하면서 1층부터 4층까지 온갖 전시물들을 구경하지만, 실제 그 물건들은 오르한 파묵이 여러 곳에서 사들인 물건이란 것이지요.


20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은 기다렸다는 듯이 필생의 작업에 돌입합니다. 몇 년에 걸쳐 한 여인의 흔적을 사들였던 것이지요. 1층 벽면에 전시되어 있는 4,213개의 담배꽁초는 여주인공 퓌순의 흡연 흔적입니다. 그녀의 머리핀, 그녀의 손가락이 지나간 커피 잔, 그녀가 즐겨 마셨던 음료수병, 심지어 그녀가 사용했던 칫솔까지 수 만개의 물건들을 수집했습니다. 물건들을 수집하면서 파묵은 소설 집필을 동시에 진행해 나갔습니다. 소설을 쓰는 동안 어쩌면 파묵 자신이 케말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파묵의 대표적인 자전적 소설 이스탄불은 그가 태어나고 사랑했던 도시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몰락한 오스만제국의 흔적을 쓸쓸한 톤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기이하게도 순수박물관에서 이스탄불의 체취가 느껴졌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인이 된 퓌순에 대한 평생의 그리움을 그린 순수박물관이 이스탄불에 대한 파묵의 사랑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지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강력했던 대제국에 대한 그리움, 시간의 흔적, 이스탄불의 아름다움, 이런 것들을 파묵은 형상화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순수박물관은 소설을 실재로 형상화한 것인데, 그곳에 가면 사람들은 케말이 되어 퓌순의 흔적을 쫓게 됩니다. 이효석 박물관에서 ‘메밀꽃 무렵’이 실재한 인물로 느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만 엄청난 양의 수집품이 한 소설가의 ‘작품’이라는 것이 놀라울 뿐이지요.


진짜이면서 가짜인 순수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쉴 새 없이 몰려듭니다.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사랑과 집착이 박제되어 있는 현장은 사실 소설가가 여기저기에서 사들인 허구이지만, 사람들은 그것들이 사실이라고 착각하면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듭니다. 순수박물관은 순수박물관 주변 거리의 모습을 변화시켰습니다. 허름하던 동네는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주변 상가를 살려냈습니다. 스토리텔링이 가진 힘이 어떤 것인지를 순수박물관은 보여줍니다. ‘창조경제’를 이 대목에서 언급하는 것이 뜬금없을지 몰라도 순수박물관이 그 개념에 딱 부합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한 사람의 소설가, 한 편의 소설작품, 박물관 건물 하나, 이들이 엮어내는 판타지가 순수박물관입니다. 텔레비전이라는 막강한 소통 수단을 가진 대전MBC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런 일입니다.


7월에 대전MBC는 ‘고향마실페스티벌’을 엽니다. 이제는 ‘순수박물관’에 박제됐다고 생각되는 고향 마을을 다양한 모습으로 체험하는 축제가 될 것입니다. 대전MBC 연접부지에서는 로컬푸드 장터가 열릴 예정입니다. 매주말 대전MBC에 오시면 정갈하고 먹음직한 각종 로컬푸드들이 여러분을 기다릴 것입니다. 여름방학이면 고향을 찾곤 했던 추억은 전국이 1일 생활권으로 들어가면서 빛을 바랬다고 하지요. ‘고향마실페스티벌’과 로컬푸드 장터에서 추억을 다시 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장터 어느 곳에서 당신이 찾던 옛 친구를 만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대전MBC 사장 이진숙

'CEO의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르스의 교훈”  (0) 2015.07.06
“저녁 준비했으니 점심 먹지 마세요”  (0) 2015.07.06
어느 후배 이야기  (0) 2015.07.06
지식의 보물창고를 선물한 스미슨과 5월  (0) 2015.07.06
터키에서 길을 묻다  (0) 2015.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