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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의창



워싱턴에서 특파원으로 있을 때 경험한 일입니다. 워싱턴을 방문한 손님들과 박물관에 갔는데, 식사 시간이 되어 푸드코트로 내려갔지요.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어서 카페를 겸한 식당은 점심시간이면 엄청난 인파로 북적였습니다. 물론 박물관 측에서는 음식을 주문하는 일에서부터 그릇을 치우는 것까지 셀프서비스로 하도록 해서 수천 명의 인원이 들락거렸지만 큰 혼란은 없었습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 것은 오후 한 시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겨우 발견한 빈 테이블에 앉았는데, 직전에 식사를 한 손님들이 남기고 간 음식물 찌꺼기가 테이블 위에 남아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하듯이 우리 일행은 냅킨으로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아있는 그릇에 음식찌꺼기를 담고 식탁을 닦고 있는데 어디선가 종업원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냥 두세요. 제가 정리할 겁니다.” 우리 일행 가운데 누군가가 응대했습니다. “누가 치우면 어때요. 우리가 정리해도 되는데...” 그러자 종업원의 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손님들이 치우면 제 일자리가 없어지잖아요.” 짧지만, 제 귀에는 너무도 강력한 말이었습니다. “손님들이 치우면 제 일자리가 없어지잖아요.”


일에 대한 투철한 직업의식과 또 절박함이 묻어있지 않습니까? 한 편에서는 그만큼 회사가 직원 관리를 철저히 (비인간적으로?)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하기야, 식당 종업원의 첫 번째 임무는 식당을 깨끗이 정리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손님이 해야 한다면 종업원을 유지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


그 푸드코트에서 종업원의 말을 듣고 처음 수습기자로 입사했을 때를 떠올렸습니다. 방송기자의 업무는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고 방송을 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기사가 텔레비전에 처음 방송됐을 때의 그 기분은 방송기자가 아니면 짐작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텔레비전에 한 번 더 나가고 싶어 차장, 부장 선배들에게 본인 기사의 가치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요했던 일이 몇 년이 지나면 때로는 ‘둘둘 말아주고 마는’ 짐이 되기도 합니다. 입사 초년에 밤을 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치열함은 점차 줄어들고 할 수 없이 때워주는 의무가 되는 것이지요. 스스로 좋아서 하는 취미 활동에는 피곤함을 잊지만 회사의 ‘일’은 어쩔 수 없이 ‘때워주는’ 경우도 생깁니다.


청년실업이 사회적인 문제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3포 세대’, ‘5포 세대’라는 말까지 나왔지요. 수명은 길어지는데 은퇴 후 일은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인생 2막’, ‘인생 3막’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과연 나에게 일은 무엇인가? 누구나 해도 되는, 누가 해도 상관이 없는 기본 밥벌이인가? 아니면, 나에게 일터를 주고, 내 가족을 먹여 살리고, 실업자가 되지 않게 해주는 신성한 어떤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일이 나에게 큰 의미가 없고, 돈벌이의 수단 외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역으로 평생 그곳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반면,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나에게 큰 의미가 있고, 그 일을 빛나게 하면 그 사람은 더 크고 더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것입니다.



메르스 사태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의 엄숙한 중요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악화됐다고 생각됩니다. 감염된 사람은 정직하게 사실을 알려야했고, 병원은 병원 이익이 아니라 사회의 이익을 앞세워 있는 사실을 그대로 알리고 바이러스 확산을 막았더라면, 또 보건당국은 심하다고 할 정도로 방역 작업에 나섰다면 귀중한 생명을 더 아낄 수 있었을 겁니다. 내 일의 엄숙함을 생각지 않으면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되고 그러면 나는 그 조직에 필요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치울게요. 손님들이 치우면 제 일자리가 없어지잖아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이 말이 떠오를 때마다 오싹한 마음이 들지만 또 한편에서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일의 엄숙함을 깨닫곤 하지요. 일에 관한 생각, 시청자 여러분께서는 어떠신가요?

 

대전MBC 사장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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