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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의창

상징

상징

얼마 전 러시아 알타이 지역에 답사 여행을 할 때 일어난 일입니다. 노보시비르스크(‘뉴 시베리아’라는 뜻)는 한낮에는 뜨거웠지만 아침저녁은 선선한 날씨를 보였습니다. 시냇물은 한낮에도 발을 오래 담그기 힘들 정도로 차가웠지요. 그런 기후 환경에서 통나무집 호텔로 체크인을 했습니다. 시베리아 지역은 전역이 자작나무 숲이라고 표현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온통 자작나무로 덮여 있었습니다. 몇 백 년은 됨직한 자작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었고 그래서 가옥들도 대부분 자작나무를 이용한 목조 가옥이었습니다. 호텔도 현대식 건물로 된 것도 있었지만 흔한 자작나무로 지어진 통나무집 형태의 숙박시설도 많았습니다. 우리 일행은 후자의 통나무 호텔로 들어갔습니다.

 

온종일 답사 여행을 하고 난 터라 피곤한 몸을 씻으려고 샤워 물을 틀었습니다. 통상 1분 정도는 기다려야 온수가 나오기에 잠시 기다렸다가 손을 대보는데 웬걸, 북극 얼음처럼 차가운 냉수가 쏟아지는 겁니다. 3-4분을 더 기다렸습니다. 그래도 냉수의 ‘폭포’는 온수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산으로 들판으로 헤매고 다닌 몸을 씻기는 씻어야 하고 프론트에 연락하려니 이미 한밤중이라 하는 수 없이 머리부터 감으려고 찬물을 조금씩 적셨습니다. 전신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오싹함이 느껴졌습니다. 순간, 뭔가에 홀린 듯 파란색으로 표시된 쪽으로 수도꼭지를 틀었습니다. 언젠가 아랍국에서 경험했던 데자뷰를 느꼈다고 할까요. 파란색이 표시된 수도꼭지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수도꼭지의 표시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파란색으로 표시된 쪽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고 빨간색으로 표시된 곳에서 찬물이 나왔던 것이지요. 만약 계속 그 ‘잘못된 신호’를 믿었다면 저는 북극 물처럼 차가운 찬물에 샤워를 했을 것입니다. 신호와 상징이 주는 엄중함이 이렇게 큽니다.


‘신호’는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하는 약속입니다. 파란색 수도꼭지에서는 찬물이 나와야 하고 빨간색 수도꼭지에서는 뜨거운 물이 나와야 합니다. 그 신호와 약속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되면 ‘혼란’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혼란’과 함께 불신도 따르겠지요. 어떤 수도꼭지에서는 신호가 약속한 대로 나오고 또 다른 수도꼭지에서는 약속한 대로 되지 않으면 결국 그 신호 체계는 작동하지 않는 가치 없는 체계로 전락합니다. 수도꼭지는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대부분 경우에 있어서 생명에 지장은 주지 않으니까요. 대표적인 신호 체계는 교통신호등입니다. 초록색은 ‘가라’는 신호이고 빨간색은 ‘가지 말라’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를 어기면 나의 생명은 물론 타인의 생명까지 앗아가는 사고가 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유치원에서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 중의 하나가 교통신호가 담고 있는 상징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상징을 구체화시킨 것이 법이고 규정입니다. 남성들은 일정 나이가 되면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되고 모든 국민들은 납세의 의무를 지게 됩니다. 법 앞에 평등하다는 말이 있지만 만약 신분이 높다고 해서, 재산이 많다고 해서 의무를 경감시켜 준다면 그것은 ‘잘못된 수도꼭지’가 주는 것처럼 잘못된 신호를 사회에 주게 될 것입니다. 분명 빨간색 수도꼭지에서는 뜨거운 물이 나와야 하는데 찬물이 나온다면 그 수도
꼭지를 믿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국민들은 법체계를 믿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혹시나’ 해서 파란색 수도꼭지를 틀어서 뜨거운 물을 받은 것처럼 한 번 두 번 속아본 사람들은 신호를 믿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게 되겠지요.


이런 ‘반칙’이 계속되면 결국 신호체계 모두가 무용지물이 되고 국가를 구성하는 체계도 무너집니다. 2004년 아프가니스탄을 취재했는데, 그때 수도 카불이 그랬습니다. 희한하게도 한 나라의 수도에 교통신호등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자동차들은 제멋대로 길을 찾아 빵빵거리며 달렸고 인도와 차도도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좌회전 우회전도 제멋대로, 유턴도 아무 장소에서나 제멋대로 했습니다. 그것은 교통신호등을 설치할 비용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수도 카불에서는 신호등 두 개를 목격했는데, 그것도 물론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신호등을 설치해봐야 사람들이 그것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고, 따르지 않아도 처벌을 할 경찰 조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호가 담고 있는 상징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약속입니다. 그 신호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사회의 근간이 무너집니다. 그것은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전MBC 사장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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