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제법 오래 전의 일인가 봅니다. 고향 서천에서 공주로 이사 오고 직장을 옮기고 나서 1979년에 흙의 문학상이란 상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 상은 제법 큰 상으로 한국문예진흥원에서 주관하는 상이었고 대통령 이름으로 주는 상이라서 나는이 상으로 해서 중앙문단에소개되는 시인이 되었고 지역에서도 대접받는 한 사람의 시인이 되었습니다.
그 때 제일 먼저 연락을 주고 방송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준 방송국이 바로 대전MBC입니다. 담당이 김수안 피디였습니다. 그 때 이분은 차장이라 불렸으며 내 또래의 나이로 매우 선량하고 차분한 분이었습니다. 50분 정도 방송 분량이라서 사흘을 내리 찍었던 기억이 납니다. 집에서 찍고 학교에서 찍고 공산성에서 찍고 갑사에서 찍고 금강 변 상록원이라는 찻집에서 찍고 마지막 장면을 금강 가 백사장에서 석양의 장면을 찍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티브이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녹화기능이 딸린 티브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 네 식구는 대전까지 나가 볼일 보고나서 한 음식점에 쭈그리고 앉아서 방영 프로그램을 보았고 보관 테이프를 갖고 싶어서 전파사에 부탁하여 테이프 하나를 구입했던 기억입니다.
그것은 VHS 식이라서 지금은 재생해주는 기계가 없어 볼수도 없는 테이프입니다.그렇지만 그 일은 나에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을 뿐더러 기쁜 추억과 함께 자긍심이 되어주었습니다. 지금은 티브이 출연이 일반인들에게도 쉽게 열리는 시대가 되었지만그 때만 해도 기회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프로그램 이름이 ‘참된 생활인’이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프로그램 이름부터가 격세지감이 있는 이름입니다.
그 뒤로는 쉽게 대전MBC와 연결이 되었습니다. 방송이든 신문이든 지내놓고 보니까 한번 관계를 좋게 맺으면 자꾸만 좋은 관계가 맺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언론사의 한 생리이기도 하겠지만 인간사 모든 일이 그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티브이뿐만 아니라 라디오 방송에도 자주 출연을 했던 기억입니다. 한번 가서 여러 차례 녹음을 해두었다가 방송하는 식으로 했습니다.
티브이에 비하여 라디오는 마음의 부담이 적어서 좋았습니다. 엔지를 낸다 해도 쉽게 고쳐 잡을 수 있어 그 또한 좋았습니다. 한번 연재를 시작했다 하면 몇 년을 내리 계속했던 기억입니다. 그 바람에 나름 책도 읽고 공부도 했을 뿐더러 남겨진 방송 원고들을 모아 산문집으로 내는 기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일석이조가 된 셈이지요.오늘에 이르러 기억에 남는 피디는 임종식 피디와 김종찬 피디, 그리고 최순희 피디입니다. 최순희 피디는 예전 동직원이었던 최유영 선생의 누이 되는 분으로 개인적으로매우 살갑고 업무적으로도 친밀하게 대해준 분입니다. 그리고 김종찬 피디는 주로 라디오 프로그램을 같이 했던 매우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명상적이기까지 해서 오래 그 인상이 남는 분입니다. 새벽같은 분이라 그럴까요. 역시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분은 임종식 피디입니다. 이분은 매우 열정적인 성격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태도와 깊이가 달랐습니다. 나의 시와 인생을 한 차례 프로그램으로 제작한 일이 있었는데 서로가 호흡이 잘 맞았을 뿐더러 내시와 인생과 시에 대한 탁월한 해석으로 작품을 만들어 주어 지금도 그 장면 장면이 기억에 선명한 바 있습니다.
최근엔 허참 씨와 함께 한 토크쇼가 기억에 또 남네요.그분들, 지금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지나간 청춘과 나의 장년, 세월은 흐르고 기억은 흐리고 그래도 지나간 날들이 참 좋았다, 대전MBC와 더불어 참 좋았다 말하고 싶습니다. 다들 그 자리에서 부디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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