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게
지난 월요일(3월 7일)에 대전MBC에서는 조찬 특강이 있었습니다. 강사는 건축사 류춘수 선생이었습니다. 한계령 휴게소와 리츠칼튼 호텔, 올림픽 체조경기장 등 여러 가지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분이지만 그의 대표작은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일 것입니다. 그의 강연을 들으면서 느낀 소회를 <M스토리>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고궁들을 방문할 때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만, 모든 건물에는 스토리(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산등성이에 걸쳐서 지어진 한계령 휴게소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에 얹혀서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된 사연이나 자칫 사무실 건물처럼 될 뻔한 리츠칼튼 호텔 건물이 어떻게 독특한 건물 모양을 하게 되었는지, 그 건물 뒤에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리츠칼튼 호텔의 ‘비포(before)’와 ‘애프터(after)’는 실제 사뭇 다릅니다. 이전에는 여느 호텔 건물들처럼 건물 앞에 넓은 주차 공간이 있고 그 너머에 호텔 건물이 있었던 구조라면 지금은 인도에서 자연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건축주에게는 상당한 공간을 벌어주었고 이용자들은 편안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말 그대로 ‘윈윈’하는 공간으로 변신했지요.
류춘수 선생의 ‘건축 인생’은 ‘고정관념을 거스르는 뜻밖의 한 수’로 압축됩니다. 그가 1970년대 말 테헤란에 지으려고 했다가 이슬람혁명으로 무산된 아파트는 이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지요. 산을 배경으로 한 아파트는 산의 등성이와 같은 사선 모양으로 설계를 했고 각 아파트마다 테라스를 내어서 식물을 심도록 한 ‘생태 건축’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건축이 벽에 부딪혔다고 하지요. 사선 모양의 엘리베이터를 만들어야 하는데, 국내에는 그만한 기술을 가진 회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팩스도 이메일도 없던 시절, 그는 일본 등 선진국의 엘리베이터 회사에 직접 편지를 썼고 ‘만들 수 없다, 불가능하다’는 답을 듣다가 마침내 오티스(OTIS)라는 회사에서 가능하다는 답을 얻었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에스컬레이터형 엘리베이터라고 할까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건축에 가속도가 붙던 때 이슬람혁명이 일어났고 공사는 중단되었습니다. 이란의 랜드마크가 될 뻔했던 공사는 이렇게 끝이 나버렸지요.
올림픽 체조경기장에 대한 류춘수 선생의 아쉬움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1990년 올림픽 체조경기장 설계로 시드니 쿼터나리오 국제건축상 금상을 수상할 만큼 당시로서는 첨단 공법을 사용한 랜드마크인데 최근 한류콘서트장으로 개조하기 위해 원형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건축물들은 식민 시대와 전쟁을 거치면서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없어진 건축물에 대한 아쉬움은 표하면서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랜드마크가 ‘상업주의’에 밀려 변형된다면 또 후회할 일이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뭐니 뭐니 해도 그의 강연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의 모티브가 비행기내 잡지에서 본 방패연 그림이었다는 겁니다. 파리로 가던 기내 잡지에서 방패연을 본 순간 솟구치는 영감을 받아 설계도를 그려나갔고 이것이 월드컵 경기장으로 구체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국내 굴지의 건설회사와 맞붙어 거의 승산이 없던 게임을 그의 독창적인 설계와 해석으로 승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이라고 언론들은 대서특필을 했지요. 그림 하나 그냥 넘기지 않고 영감을 받았던 프로 정신이 있었기에 그의 업적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동양과 서양을 넘나드는 깊은 철학을 담은 그의 강연을 들으며 ‘삶의 무게’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한 분야에 전문가라고 자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지만 진정 고개가 숙여지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인생 모두를 바쳐 자신의 세계에서 무언가를 이뤄내는 사람을 ‘대가’라고 하지요. 우리나라에 더 많이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 ‘대가’들일 것입니다. 대가와 스승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흔적을 알리는 것이 언론이라면 우리가 할 일은 참으로 많습니다.
대전MBC 사장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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