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에게 가장 꾸기 싫은 악몽은 무엇일까? 그렇다. 방송 사고를 내는 꿈이다. 요즘은 잘 꾸지 않지만, 얼마 전 당직 근무를 하면서 황당한 일을 경험했다. 3시 라디오 뉴스를 하고, 3시 30분 TV 뉴스까지 무사히 마치고 사무실에 와서 잠시 책상에 앉아 잠이 들었다. 10분 쯤 지났을까, 잠에서 깨어나 3시 라디오 뉴스를 안했다는 착각으로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곧바로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긴 했지만 가슴이 벌렁거리는 현상은 30분이 지나서야 진정됐다.
TV 화면에 항상 좋은 모습만 보이는 아나운서는 부러움의 대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사전에 원고를 외우거나 생방송 도중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마인드 컨트롤을 수없이 해야 한다. 몸살이나 허리통증 등으로 몸이 힘들 때도 방송에 들어가는 순간만큼은 잠시 현실의 나를 떠나 있다가, 방송을 마치면 다시 고통으로 힘들어하곤 한다.
천직이 방송장이라서 말을 참 잘하는 사람이었다면 하지 않을 고민이었겠지만, 후천적 노력에 의해 방송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남들보다 몇 배 ‘준비’를 해야 한다. 지난 연말에는 <조영남 토크 콘서트>에서 진행을 맡게 되었다. 조영남 씨가 누구인가? 각종 예능 프로나 라디오 프로에서 보듯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세출의 괴짜가 아닌가? 이런 분과 무려 두 시간 동안 방송을 하며 무사히 진행을 마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먼저 방송 전에 인터넷으로 조영남 씨에 관한 자료들을 검색했다. 방송에서 했던 말들도 찾아보고 나름대로 그에 대해 ‘공부’를 했다. 분장을 마치고 오프닝까지는 무사히 마쳤다. 이어서 첫 곡이 끝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와의 토크쇼를 이끌어가야 했다. 어린 시절과 가수 데뷔, 사랑, 가수 이외의 삶, 인생이란 소주제를 차례대로 풀어낼 계획이었다. 그래서 녹화장에 온 청중들이 조영남 씨의 노래와 인간 조영남의 진면목을 잘 느끼고 가도록 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그와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첫 질문부터 그에게 혼이 났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자 가르친 적이 없으니 선생님이라 부르지 말고 ‘형님’이라고 부르라는 것. 순간 당황했지만 ‘그래, 편하게 녹화하자’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얘기를 풀어갔다. 하지만 이후에도 조영남 씨의 자유분방함과 나의 미숙함이 예상외의 조화(?)를 이루며 처음 생각했던 이야기 순서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청중들은 엉뚱한 그의 매력과 당황하는 나의 모습에 즐거워했다. 녹화를 마치고 난 뒤 다시 한 번 나의 부족함을 깨달았다. 그 상황에서 이렇게 내가 말을 치고 나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그렇다. 사람들은 화면에 보이는 아나운서 임세혁의 모습만을 바라보며 잘 해낼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있을 지 모르겠지만, 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면 부족함과 허점투성이란 생각이 든다. 잔병도 많은 편이다. 그래서 아침 뉴스를 진행하면서 최고의 컨디션으로 시청자와 마주하지 못할 때는 시청자들에게 죄송스런 마음이 들기도 한다. 대전MBC에 입사해 뉴스를 비롯해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다보니 때로는 어떤 프로그램도 자신이 있다는 자만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방송은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다.
아나운서가 진행해야 하는 TV와 라디오 프로그램들은 종류도 다양하고 그에 따라 진행자에게 요구하는 것도 제각각 다르다. 뉴스와 스포츠는 정확함과 전달력을, 교양프로그램이나 행사프로그램은 편안하게 전체를 아우르면서 끌어가는 노련함을 요구한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전달력과 함께 자연스런 애드립을, 시사 프로그램은 출연자의 주장을 충분히 이끌어낼 수 있는 적절한 질문과 유도가 필요하다. 이 모든 걸 갖추는 게 참 어렵다. 성격상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 편이기 때문에 미완성인 상태로 방송이란 무대에 나가는 것이 늘 두렵다. 하지만 이왕 내게 맡겨진 이상 잘 하고 싶은 욕심은 많다. 모든 아나운서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이크 앞에 선지 만 17년이 되어간다. 방송과 삶 모두 연차에 맞는 실력과 교양을 갖췄는지 끊임없이 성찰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싶다.
임세혁 아나운서 | 편성제작국 제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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