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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역사도시 이스탄불에서 느낀 단상(斷想)들

보스포러스 해협에 비친 눈부신 태양
아침 해를 머금은 보스포러스 해협은 눈부셨다. 우거진 숲과 검푸른 바다, 주황색 지붕의 예쁜 집들. 터키 이스탄불 힐튼호텔 식당에서 바라 본 보스포러스는 충동적일 만큼 매혹적이었다. 신화와 역사와 인류의 흥망사를 함께 해온 보스포러스. 그 해협을 거느린 이스탄불에서 열린 2015 ABU(아시아 태평양 방송 연맹)총회 참석은 이렇게 시작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2015년 10월 27일이었다. 보스포러스는 그리스신화에 적을 두었다. 신과 인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우스는 바람둥이였다. 그런 그가 이오라는 여신과 바람을 피웠다. 이를 알아차린 제우스의 부인 헤라는 이오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제우스는 애인 이오를 황소로 변하게 해 헤라의 눈을 속이려했으나 들통이 나고, 이오는 마침내 바다를 건너 도망하기에 이른다. 이 때 건넌 바다가 바로 ‘소가 건넌 곳’이라는 뜻의 보스포러스다. 고대 신화의 땅에서 첫날 일정을 시작했다.

 

 

 

 

 

2015 ABU 행사에 집중하다
ABU 총회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됐다. 그 중에서 나의 관심은 각종 행사에 모아졌다. 광고유치와 행사사업이 주 업무인 나로선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행사 가운데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TV Song Festival과 ABU 시상식이었다. 행사는 전반적으로 화려하진 않았지만 격조가 있었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TV Song Festival은 총회의 하이라이트인 ABU 시상식의 전야제 성격으로 진행됐다. 팡파르와 함께 등장한 남녀 MC의 모습이 관중을 압도했다. 늘씬한 몸매에 멋과 미모를 함께 갖춘 이들은 배우 Engin Hepileri와 텔레비전 호스트 Ece Vahapoglu였다.
회원국 12개 팀이 벌인 노래잔치에 초대된 한국대표는 CNBLUE(씨엔블루)였다. 큰 키에 수려한 외모, 강렬한 리듬의 밴드는 그들의 히트곡인 ‘신데렐라’로 순식간에 무대를 장악했다. 3천명은 족히 수용할 Istanbul Congress Center는 함성과 환호와 음악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한류의 단면을 보여준 ABU TV Song Festival은 터키 국영방송인 TRT로 전국에 생방송됐다.

 

 

 

터키에서 한류를 경험한 건 예기치 않은 수확이었다.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젊은이들이 많아 놀랐다. 한 리셉션장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 젊은 여성은 치과를 전공하는 여대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얼굴이 무척 아름다웠다. 이진숙 사장님이 “참 예뻐요” 라고 덕담을 건네자 그 학생이 즉각 말을 받았다. “너도 예뻐!” 우린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Conrad Istanbul Bosphorus Hotel에서 열린 ABU 시상식은 멋졌다. 홀은 화려하진 않지만 고급스러웠으며 음식은 맛있고 깔끔했다. 이번에 246개 출품작이 경쟁을 벌여 사회에 혁신적인 모범을 보여준 작품들이 상을 받았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ABU상 보다 훨씬 무게감이 느껴졌다. 시상식 중간에 넣은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들의 연주와 MC들의 자연스런 진행, 단조롭지만 화려한 무대연출이 돋보였다.

 

보스포러스...그 곳에 한국인이 역사를 짓다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보스포러스 해협은 고대부터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다. 총회 공식행사로 보스포러스 크루즈를 마련해 준 건 대단히 고마운 일이었다. 해협 양측 해안에는 고대 유적지와 그림같이 들어선 터키마을, 요새 같은 절벽과 어울린 울창한 숲이 장관이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이렇게 멋지고 유용한 해협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죽였을까?


페르시아 제국에서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로마 제국에서 비잔틴 제국, 오스만투르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민족 수많은 제국들은 길이가 30km, 좁은 곳은 폭이 700m에 불과한 이 작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죽고 죽이는 전쟁을 이어갔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과연 삶이 무엇이고 역사란 게 무엇인지 숙연해졌다. 수천 년 동안 이 싸움을 지켜본 보스포러스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이 곳에 대한민국이 새 역사를 쓰고 있었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세 번째 다리를 건설 중인데 현대건설과 SK건설이 공사를 진행하고 있단다. 길이 1,875m, 폭 59m, 높이 320m로 사장-현수교 복합방식의 야부즈 술탄 셀림교다. 이 다리가 완공되면 세계최고최장 다리가 된다니 자랑스럽다. 거기에 더해 보스포러스 해협 바다 밑 터널공사도 SK건설과 터키 건설사가 공사를 진행 중인데 오는 2017년 개통예정이란다. 동양의 반격이 시작됐고 대한민국이 한 축을 맡고 있다는 치기가 발동했다.


이스탄불 유적에서 인간사 흥망성쇠를 읽다
ABU 공식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틈틈이 이스탄불 알기에 나섰다. 보스포러스를 사이에 두고 동서양을 품은 이스탄불은 2천 년의 역사도시답게 곳곳의 유적들은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와 비잔틴,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스탄불의 상징으로 불리는 성 소피아 성당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5년에 처음 세웠다. 우리 역사로 치면 백제가 한성에 있을 때 고구려 백제 신라가 땅을 뺏고 뺏기는 각축전을 벌일 때였다. 이로부터 200여년 뒤 성당은 개축되고 나중에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면서 이슬람 사원으로 용도가 바뀌었지만 건물은 여전히 견고하고 웅장했다.


15세기에 세워진 톱카프 궁전은 오스만제국의 영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제국의 술탄 군왕들이 거처한 곳으로 한 때는 시중과 군사 등 5만 명이 살았다고 한다. 톱카프 궁전이 19세기 초까지 오스만의 웅장함을 대변한다면 돌마 바흐체 궁전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 따 19세기 중반에 지은 이 궁전은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됐단다. 크리스탈로 만든 4톤짜리 샹들리에는 그 자체로 위압감을 주었다. 방이 285개, 홀이 43개라고 하니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건축비가 지금 돈 5억 달러...왕실의 재정악화는 700년700년 오스만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균형 잡힌 세계사를 위하여? 정신 차려 너는 사업국장이야!
지금의 세계사는 서양인들의 시각에서 쓰였다. 동양인인 징기스칸과 오스만의 유럽지배는 서양인들에게 그리 반가운 소재는 아닐 것이다. 특히 오스만 제국은 나중에 40여개 나라로 분리될 만큼 불멸의 제국이었으나 세계사에서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때마침 세계경제를 장악했던 동양이 어떻게 불과 200년 사이에 서양에게 역전 당했는가를 다룬 책을 읽는 중이었다. 책은 1,400년부터 1,800년까지 동양이 세계무역과 경제활동 생산성 모두 서양을 앞섰지만 1,800년대 후반에 서양에 역전 당했다고 썼다. 서양의 역전을 가능하게 만든 역사적 계기는 바로 영국의 산업혁명이었다. 이후 산업자본주의와 서구식 체제는 세계사의 중심가치가 되었다.


이처럼 언제나 경제력과 효율성은 국가나 사회의 경쟁력을 담보하고 역사를 만들어 간다. ABU 총회를 지켜보면서 동양의 재기를 생각해낸 건 지나친 비약일까? 60여 개국 270여 개 회원사를 둔 ABU의 발전이 가속화되는 현장을 목격하니 엉뚱한 생각만은 아니라는 확신이 섰다. 거기에 MBC가 ABU의 중심가치와 실행력을 앞서서 견인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까지. 여기까진 좋았는데... 갑자기 흥을 깨는 생각이 혀를 쏘옥 내밀며 달려들었다. ‘11월 광고수주는 얼마나 될까... 직거래 실적은?’ ‘행사협찬은 어디를 붙여야 하지?’ 실적에 울고 우는 사업국장의 숙명이다.

 

권흥순 | 사업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