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 만들어내기 (Manufacturing Consent)
정말 오랜만에 회사에서 밤샘이란 것을 했습니다. 결재도 처리하고 밀린 일도 하다가 최근에 접한 <Manufacturing Consent>를 생각해 냈습니다. <Manufacturing Consent>는 에드워드 허먼과 노암 촘스키가 공저한<Manufacturing Consent: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Mass Media>란 책을 바탕으로 구성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기로 작정한 것은 한국에서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언론의 상황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찾아내고 보니 어리석은 결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영화의 길이는 무려 2시간 47분, 그러나 영화를 보기시작한 순간 내리 끝까지 보고야 말았습니다. <Manufacturing Consent: Noam Chomsky and the Media(이하 Manufacturing Consent, 1992)>는 기성 미디어, 특히 대규모 언론사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내레이션 없이 순전히 인터뷰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중심축은 전 세계 언론사(방송사)가 촘스키와 가진 인터뷰들입니다. ‘Manufacturing Consent’는 ‘동의 만들어내기’라고 번역했지만 현실을 감안해서 다소 선정적으로 제목을 뽑는다면 ‘동의 제조 공장’으로 번역할 수도 있겠습니다.
뉴욕타임스가 ‘아마도 생존한 인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성인(arg uably the most
important intellectual alive)’으로 꼽은 촘스키는 이 다큐에서 미디어와 민주주의에 대해 몇 가지 논쟁적인,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미국에서 기성 미디어는 권력을 가진 20%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며, 권력을 가지지 않은 ‘보통사람’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It’s the primary function of the mass media in the United States is to mobilize the public support for the special interests that dominate the government and the private sector.”)
2.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권력자가 독단적으로 결정을 하지만 민주국가에서 권력기관(정부와 대기업)은 미디어를 활용하여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한다.(thought control)
3. 선동 모델(propaganda model)을 사용하여 현실을 왜곡한다: 언론사 크기, 소유권, 수익원, 광고허가권(사실상 광고주), 정보원(권력기관), 압력단체(flak), 반공주의(냉전 종식 후에는 테러와의 전쟁으로 변경)
4. 대안은 기성 언론에 속지 않기 위한 개인적 노력과 대안 언론(alternative media)이다. <Manufacturing Consent>는 내용 면에서는 30년 동안 언론에 종사해온 필자에게 굳이 새로운 것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큐는 최근에 본 가장 강렬한 콘텐츠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큐의 내용보다 촘스키라는 지식인이 살아온 방식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깨어있는 시민은 언론을 깨어있게 하고
결국 더 나은 세계를 만듭니다"
명문 MIT대학 교수에다 살아있는 지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촘스키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1960년대 반전운동을 시작으로 사회활동가의 길로 들어선 촘스키의 일생은 ‘아웃사이더’의 삶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유태인이면서 팔레스타인의 생존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왔고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도 신랄한 비판을 해왔습니다. 그는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력의 편이 아니라 약자(underdog)의 편에서 살아왔습니다. 지식인은 아는 것이 많아서 비겁하다는 말이 있지만 촘스키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정부는 자랑스러워할 것이 없으며 근본적으로 폭력적인 존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그는 시민들이 깨어나 기성 언론들이 주입해주는 것에 통제받지 않아야 멍청한 다수(stupid majority)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렇게 목소리를 내면서 호되게 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였습니다. ‘홀로코스트, 유태인 대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학자의 ‘언론의 자유’를 지지했다가 엄청난 공격을 받은 것이 한 예입니다.
이 다큐에서 그는 왜 약자를 위한 ‘아웃사이더’가 되었는지 에피소드를 들려줍니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 뚱뚱한 급우가 여러 명의 아이들에 둘러싸여 놀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그중의 한 명이 3학년쯤 되는 자신의 형을 데려와 뚱뚱한 아이를 때리려고 했습니다. 7살의 촘스키는 처음에는 그 아이를 보호해주려고 그 애 옆으로 가서 섰는데, 좀 있다가 무서워서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평생 수치스런 기억이 되어 따라다녔고 약자의 편에 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론계, 특히 방송계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지금 한국 시민들이 한 번쯤 볼만한 다큐가 <Manufacturing Consent>가 아닐까 싶습니다. 촘스키가 언론의 ‘신’은 아니지만 현재 한국의 언론 상황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지 궁금해집니다. ‘모든 정부는 폭력적인 존재’라고 규정한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권력을 가진 정부는 끊임없이 언론을 장악하려 시도할 터인데, 이것을 막아내는 것은 결국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입니다.
<Manufacturing Consent>는 서두에, 세계는 20퍼센트의 엘리트와 80퍼센트의 어리석은 대중으로 나누어진다고 전제하고, 미디어는 20퍼센트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촘스키는 수많은 강연과 인터뷰를 통해 기성 언론에만 의존해서는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없으며 스스로 자료를 찾아보고 연구해야만 속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우매한 대중이 되지 않으려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야 한다는 것인데, 그 결과는 엘리트 독자·시청자, 민주시민이 되는 것이겠지요. 물론 여기서 엘리트라는 것은 20퍼센트의 엘리트와는 다른 의미일 것입니다. 권력자가 아니라 지식인쯤이 되겠습니다. 강자의 편이 아닌 언론, 권력의 편에 서지 않는 언론은 깨어있는 시민이 만든다는 것이 이 다큐의 메시지입니다. 깨어있는 시민은 언론을 깨어있게 하고 결국 더 나은 세계를 만듭니다. 촘스키의 말을 빌면, ‘무정부 혁명’, 즉 통제가 없는 협력의 세계(Anarchy revolution:cooperation without constraints)입니다. (본 글은 보고서로 작성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대전MBC 사장 이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