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일기 – “최선을 다하자”
나의 귀농은 1987년에 시작된다. 80년 군 전역 후 아버지 투병으로 빚더미에 쌓인 집안을 위해 열사의 나라로 떠나 3년간의 노동으로 빚을 청산하고 결혼도 하였다. 그 후 더 큰 뜻을 위해 100일도 안된 아들과 아내를 남겨두고 쿠웨이트로 나갔고, 목돈을 만들어와 주옥농장이라는 사과 과수원을 하며 귀농이 시작되었다. 지금의 귀농은 많은 지원과 혜택이 주어지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런 지원 없이 농사짓는,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사과나무를 심어놓고 여러 관계기관을 찾아가 관련 교육을 받으며 사과 관련 지식을 습득하였다. 당시 친환경 농법을 시도하다가 몇 년 동안 농사 실패도 겪었다. 흔히 하는 말로 ‘이거 하다 안 되면 시골 내려가 농사나 짓지’라는 사람도 있지만, 농사도 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실패를 한다. 정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꾸준히 사과농부 30년 길을 걸었고, 지금은 나만의 자연농업방식으로 감칠 맛 나고 갈변이 적은 사과를 생산하며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고 인정받는 농부가 되었다.
아들의 일기 – “결심 그리고 결심”
나는 농사가 싫었다. 어릴 적부터 싫었다. 하지만 철이 들 무렵 20살 때부터는 봄, 가을 농번기마다 부모님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그 만큼 바쁘고 일손이 부족했다. 군복무 시절에는 일부러 과수원 일을 돕기 위해 휴가를 맞춰 나오곤 했다. 싫지는 않았다. 놀고는 싶어도 부모님 일이고, 내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공무원을 꿈꿨다. 대학을 졸업 후 시험 준비를 위해 1년간 조교 생활을 하며 돈을 모았다. 그 즈음 아버지께서 과도한 노동으로 허리에 협착증이 왔다. 20년 이상 사과나무를 기르다 보니 나무가 노쇠해, 이제 막 새로운 농장을 개원한 참이었다. 몇 달간 큰 고민을 하였다. 하지만 결국은 내가 농사를 짓지 않으면 모든 하중은 어머니께 고스란히 돌아갈 것이고, 남자도 버티기 힘든 농사일을 여자 몸으로 버틴다는 것은 정말 버겁기에 나는 사과농사를 짓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농업기술센터 팀장의 조언으로 한국농수산대학 과수학과에 진학을 하여 농업에 대해, 그리고 사과에 대해 공부하였다. 농업에 아무런 기초가 없었던 나로서는 참 좋은 선택이었다. 든든한 은사님을 만났고, 사과를 공부하는 여러 친구들을 만났다. 경쟁자가 아닌 동업자로 우리는 서로 많은 부분을 공유하였고, 현장으로 나와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다.
나는 귀농을 결심하기 전 농업에 대해 밝은 비전을 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농사만 잘 지어서는 딱 망하기 좋은 꼴이었다. ‘농사도 사업이다’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농사는 그냥 지어지지 않는다. 거름을 주어야 하고, 농약도 주어야 하고, 기계도 필요하고, 일손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공짜가 아니다. 돈이 들어가는 투자다. 단순 몇 백이 아닌 몇 천만 원이 들어간다. 시골에 사는 친구들조차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절로 나무에 달린 거 그냥 따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 농사는 하늘과 땅이 짓고, 농부는 거들뿐이라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 사과농사 교육체험을 받다 보면 농사가 저절로 지어지는 줄 아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다. 요즘 농부는 멀티플레이어야 살아남는다. 뭐든 잘해야 한다. 온라인, 오프라인 가릴 것 없이 뛰어다녀야 한다. 날이 갈수록 비싸지는 원자재 가격, 누구도 알 수 없는 기상변화, 그에 반해 계속 떨어지는 농산물 가격. ‘내 선택이 옳았던 것일까?’ 난 대답한다. 이 물음의 정답은 옳았다고, 그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날까지 노력할 것이다. 지금의 나는 고객들의 응원에서 희망을 찾는다. “너무 맛있어요. 아이가 다른 집 사과는 안 먹고 이 사과만 찾아요.” “사과 먹으려고 몇 달 기다렸어요.”라는 짧은 격려의 말들이지만 이분들 때문에 더 노력하고 맛있는 사과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나의 농업철학은 정직이다. 농부의 정성이 들어간 사과. 사과는 겉멋이 아니라 맛이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겨울부터 한 알의 잘 익은 사과가 내 손에 들려지기까지 모든 부분을 숨김없이 고객에게 솔직히 얘기하고 치장하려 하지 않는다. 살충제계란파동 등 소비자의 농민에 대한 불신이 쌓이고 있다. 알고도 속이는 농부, 모르고 농사짓는 농부. 결국 돈은 벌 수 있어도 난 이런 농부가 싫다. 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할 것이다. 진정은 언젠가는 통한다고 믿고 정직한 농부로 농사를 지으러 오늘도 난 밭으로 향한다.
아버지의 일기 – “우리 것”
농사를 지으며 농촌의 현실을 보니 모든 문화와 농법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귀농 후 바라본 시골은 인간 냄새가 나는 정이 넘치는 곳이었다. 각종 행사나 잔칫집 등 경사스런 일에는 풍물(풍장) 소리가 울렸고 주민 모두 즐겁게 지냈다. 그런데 지금은 좀처럼 듣기가 쉽지 않다. 사물놀이에 밀려 두레풍물은 뒷방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두레풍물을 복원하기 위해 ‘논산두레풍물보존회’란 이름을 걸고 잊힌 두레풍물복원과 농요인 ‘못방구(논매는 소리)’, ‘지심소리(김매기)’, 그리고 논산 고유의 소리인 노성면의 ‘딱따구리 풍장’, 상월면의 ‘물풍딩이’ 복원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2015년 전국두레풍물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2016년 논산문화예술회관 공연장에서 창단 단독공연을 성황리에 마쳤고, ‘지게풍장’을 복원하여 2017년 2회 정기공연에 선보일 예정이다.
최고가 되기 위함보다 최선을 다해 노력해 좋은 사과와 우리 것, 우리소리를 지키고 보전할 것이다.
아들의 일기 – “청년 농사짓다”
농촌이 젊어지고 있다. 농촌의 급속한 노령화를 걱정하는 분들이 많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논산시만도 100명 이상의 청년농부가 가업을 잇기 위해 혹은 창업농부가 되어 다양한 품목으로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내가 요즘 푹 빠져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전국청년농업인연합회 ‘청연’이라는 곳이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120명 정도의 회원이 지속가능한 농업농촌을 꿈꾸고, 청춘들의 행복한 농촌라이프를 지향하는 곳이다. 이익을 목적으로 모인 집단이 아닌, 상당히 진취적인 성향의 회원들로 구성되었다. 단순 농사만이 아닌 전국 회원들끼리 정보 교류는 물론, 각종 직거래장터 참가, 공동 판로 확보, 유튜브 활용, 귀농귀촌 지원정보 제공 등 다양한 활동을 활발히 진행 중이다.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나에게 그들의 모습은 큰 자극이 되었고, 그들과 같은 곳에 서고 싶어 열심히 활동 중이다.
이처럼 농촌은 작지만 큰 꿈을 가진 씨앗이 심겨졌고, 움트고 있다. 대한민국의 밥상을 책임지고 바른 먹거리를 선도하는 정직한 젊은 농부들이 많이 모였으면 한다. 그들과 함께 나도 농촌에 젊은 바람이 되어 더 열정적으로 농사를 짓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가고자 노력한다.
논산 주옥농장 운영 아버지 주시준, 아들 주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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