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미디어에 속는가?
최근 ‘매스컴의 위력’을 보여주는 역사 속의 사례를 접하게 됐습니다. 1938년, 현대 매스컴이 태동하던 시기, 미국 CBS에서 ‘세계들의 전쟁(The War of the Worlds)’이라는 제목의 라디오 드라마가 방송됐습니다. H.G. 웰스 원작의 동명 소설을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한 것이었는데, 오손 웰스 등이 주연으로 열연한 이 드라마는 화성인들이 지구를 침공함으로써 벌어지는 대혼란을 중계한다는 것이 내용입니다.
문제는 라디오 드라마가 생방송 상황을 배경으로 한 데서 발생했습니다. 1938년 10월 30일 뉴욕의 파크 플라자 호텔에서 음악회가 개최되고, 청취자들은 탱고 ‘라 꿈파르시타 (la cumparsita)’ 연주가 끊어지면서 화성으로부터의 침공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아나운서는 물론 천문대로부터 상황을 전하는 교수와 기상청, 우주인, 미국역사박물관 천문학국장, 경찰, 진압작전 부부대장, 심지어 내무부 장관까지 등장하는 ‘재난 방송’에 청취자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대응합니다. 드라마를 현실로 받아들인 일부 청취자들은 울부짖으며 거리로 뛰쳐나갔고 일부 사람들은 옷을 찢기도 했으며,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일부 도시에서는 폭도들이 활개를 치기도 했습니다. CBS로 전화가 빗발쳤고, 경찰이 스튜디오로 몰려들었습니다. 제작진은 프로그램 도중 네 차례에 걸쳐 프로그램이 픽션이라는 안내방송을 했으나 극적 효과를 위해 첫 번째 안내방송은 8시 40분이 다 된 시각에야 방송되었습니다. 그때는 이미 일부 청취자들이 픽션을 실제로 받아들이고 공황 상태가 확산된 뒤였습니다(Damage has been done).
‘세계들의 전쟁’은 미디어와 관련해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지만, 필자에게 다가온 가장 큰 의문은 ‘사람들은 왜 미디어에 속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세계들의 전쟁’에서 청취자들이 ‘속았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선, 사람들은 ‘방송’과 ‘뉴스’라는 포맷에 속았을 것입니다. 드라마는 음악회로부터 시작되고 음악회 도중 화성인들의 공격은 긴급뉴스의 형태로 전해집니다. 뉴스란 것은 무엇인가요? 방송 매체 가운데 가장 사실과 진실에 가까운 콘텐츠는 뉴스와 다큐멘터리일 것이며, 그 가운데서도 시청자들은 뉴스라는 포맷을 거의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확실하게 내세울 때 ‘뉴스에서 봤다’거나 ‘신문에 났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드라마에 등장한 인물들은 ‘권위’를 가진 인물들이었습니다. 교수, 박사, 아나운서, 경찰, 군인, 그리고 장관, 이들은 권위와 힘을 가진 인물들인데, 이 드라마는 뉴스라는 포맷과 권위가 합칠 때 어떤 가공할 힘을 발휘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뉴스에 등장한 인물들이 목소리만으로도 잘 알려진 배우(한국의 경우 신성일, 장동건, 김혜수, 전도연 등)들이었다면 청취자들이 ‘세계들의 전쟁’에서처럼 공포를 느꼈을까요. 또 교수, 경찰, 장관 등이 코미디 쇼(SNL, 무한도전 등)에 등장했더라도 이 같은 두려움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교수와 박사, 경찰, 장관 등 권위를 가진 인물들이 뉴스라는 포맷과 합칠 때, 특히 긴급뉴스의 형태로 나타날 때, 그것이 만들어내는 힘과 파급력은 때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세계들의 전쟁’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심지어 픽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권위’를 가진 인물들이었기에 청취자들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사람(수용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할 때 어떤 요소를 합치면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이 라디오 드라마는 보여줍니다(어느 나라나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할 때, 수석과 관계 장관들이 배석을 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세계들의 전쟁’이 라디오 매체를 통해 방송된 것도 극적 효과를 배가시켜 드라마를 진실로 받아들이는데 기여했을 것입니다. 텔레비전이었다면 때때로 화면 상단에 영화 제목이 자막으로 들어갔을 것이고, 드라마를 사실로 오해하는 일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라디오 드라마 한 편이 미친 파장은 컸습니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드라마를 마친 다음 출연 배우들은 건물 앞에서 기다리는 경찰과 기자, 사진기자들을 피해 뒷문으로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매체와 프로그램이 이런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에 나라를 막론하고 매체(방송)의 영향력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루퍼트 머독 같은 미디어 재벌은 호주 출신이지만 영국, 미국 등 대륙을 건너뛰어 신문과 방송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미디어가 권력이고 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디어에 대한 소유 욕망은 큽니다. 물론, 공공의 이익과 공공선을 추구하는 언론은 이 같은 권력의 욕망을 제대로 읽어내는 데서 그 기능의 첫 걸음을 시작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 이 글은 보고서 형태로 제출된 것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대전MBC 사장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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