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만화계의 거장 이현세 내가 걷는 길이 곧 역사가 된다
공포의 외인구단 속 까치와 마동탁은 내 안의 빛과 그림자
올해로 데뷔 39주년을 맞는 영원한 현역 작가 이현세! 그의 만화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작이 바로 ‘공포의 외인구단’이다. 프로야구단에서 쫓겨나 퇴물 취급받고 있던 선수들이 처절하고도 냉혹한 조련을 통해 마침내 최강팀으로 탄생한다는 내용을 담은 공포의 외인구단! 남자 주인공 까치와 엄지의 가슴 저린 사랑이야기도 한 축을 이루면서 ‘어린이만 보던 만화’에서 ‘어른도 보는 만화’로 만화 시장을 확장시켰다.
그런데 이 만화를 쓸 때가 겨우 스물여섯에 불과했다는 이현세 작가는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극 중 인물에 투영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까치는 물론 마동탁까지도 작가 자신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까치와 마동탁 둘 다 제가 가진 모습이에요. 까치는 내 안에 숨어있는 양심이라고 한다면 마동탁은 세속적 욕망의 상징이죠. 성공하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고 예쁜 여자와 결혼하고 싶은, 이런 제 안의 그림자가 바로 마동탁이에요.”
방황하던 내게 힘이 됐던 만화
이현세 작가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만화에 푹 빠졌지만 만화가 하면 실패자로 취급받던 당대 분위기 탓에 감히 만화가의 꿈은 꾸지 못하고 미대에 진학해 화가가 되려 했다. 그런데 신체검사에서 색약 판정을 받으면서 화가의 꿈을 접어야 했다. 천성이 긍정적이었던 이현세 작가는 색약 판정을 ‘만화가가 되라는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즈음 이현세 작가는 태어나자마자 큰 집에 양자로 보내졌던 사실을 스무살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방황의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자식에게 더운 밥 한 끼 못 먹인 어미의 마음을 아느냐’는 친어머니의 한탄을 듣고 정신을 차린 후 서울로 상경해 본격적으로 만화 일을 배운다. 만화가 아니었다면
운명의 파도가 그를 어디로 데려갔을지 ….
내가 가는 길이 곧 역사다
이현세 작가가 걸어온 만화가의 길은 한국 만화의 역사이기도 하다. 1980년대까지도 만화가 하면 불온 세력으로 취급당해 걸핏하면 안기부로 끌려가 ‘불량만화를 그리지 않겠다’는 구호를 외쳐야 했고, 심의의 덫에 걸려 상상의 나래도 제한될 수밖에 없는 어둡고 막막한 터널을 거쳐야 했던 때였다. 하지만 이현세 작가는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만화를 엄연한 대중문화로 격상시키고, 만화가 또한 당당히 예술가로 인정받는 시대를 열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데뷔 4년 만에 ‘공포의 외인구단’을 히트시키며 그 꿈을 이뤄내고야 말았다. 그가 쓴 ‘남벌’은 서울대 신입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만화 1위에 뽑혔고, ‘지옥의 링’을 비롯해 ‘버디버디’ 등 수많은 작품들이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온갖 상들을 휩쓸었다.
만화가 최초로 교수도 됐으니 최악을 택해서 최고의 인생을 산 셈이다.
웹툰 신인상에 빛나는 환갑의 노작가
2년 전 웹툰 시장에 뛰어든 이현세 작가. 생애 단 한 번도 타보지 못한 신인상을 웹툰으로 수상했다. 이를 계기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웹툰이라는 시장을 정복해보고 싶다는 노작가는 오늘도 해맑게 웃는다.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한 후에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뜻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좌우명으로 품고 살아왔다는 이현세 작가. 결과에 연연하기보다는 하고자 하는 일 자체에 몰입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 오늘의 그를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다음 이야기를 빨리 쓰고 싶어 속편도 내지 않는다는 이현세 작가의 다음 이야기가 몹시도 기다려진다.
김정미 / 작가